숭례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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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시|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있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 nam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241296"연합20130504" 숭례문,/><ref 5년3개월만에name="경향20130504" 복구 준공], 《연합뉴스》, 2013년 5월 4일</ref>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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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도형
|날짜 = 2010
|제목 = 순성의 즐거움
|url =
|위치 =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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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8년]](성종 9년) : 숭례문이 기울어짐. 그 시기의 적절성으로 수리를 미룸. <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03020_002 《성종실록》] 90권 9년 3월 20일, 2번째 기사. 박숙진이 백성들의 사역에 대한 시기 적절성을 아뢰니 이를 수락하다</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07019_002 《성종실록》] 94권 9년 7월 19일, 숭례문은 일손이 부족하니 수리를 미루라고 명하다</ref>
* [[1479년]] [[4월 2일]] : 숭례문 중수 완공.<ref name="cha.go.kr" /><ref name="서적 인용9788958720966" />
* [[1907년]] : [[다이쇼 천황|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서울전차|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ref name="세계20010806">{{뉴스 인용
|url = http://www.segye.com/content/html/2001/08/06/20010806000417.html
|제목 = [8·15 56돌 / ]왜색 여전한 숭례문-日帝돌담에
|저자 포위된 '국보1호' |출판사=세계일보 배연국 기자
|날짜 = 2001-08-06
|뉴스 =
|출판사 = 세계일보
|확인날짜 = 2016-03-21
}}</ref>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museumnews.kr/sub_read.html?uid=166&section=&section2=|제목=문화재 재난예방과 박물관 재난대비|저자=최종호|출판사=박물관뉴스|날짜=2008-03-03}}{{깨진 링크}}</ref>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ref>[http://gb.nl.go.kr/s_img/GB_19160704_BA1175/GB_19160704_BA1175_001.GIF 조선총독부 관보] 제1175호. 1916년 7월 4일자. p.33(三三) 조선총독부 부령제52호. 고적급유물보존규칙(古蹟及遺物保存規則). 2016년 3월 19일 확인.</ref>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ref>[http://gb.nl.go.kr/s_img/GB_19160704_BA1175/GB_19160704_BA1175_002.GIF 조선총독부 관보] 제1175호. 1916년 7월 4일자. p.34(三四) 조선총독부 훈령제29호. 고적조사위원회규정(古蹟調査委員會規程). 2016년 3월 19일 확인.</ref>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ref name="오마이20051110">{{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47&article_id=0000073066&section_id=103&menu_id=103 |제목=남대문에 덧씌운 '일제 잔재' 올가미를 벗기자 |출판사=오마이뉴스 |날짜=2005-11-10}}</ref>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91963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ref name="조선총독부 제령 제6호">[http://gb.nl.go.kr/s_img/GB_19330809_CB0001/GB_19330809_CB0001_001.GIF 조선총독부관보] 제1975호 호외. 1934년 8월 9일자. 제령 제6호. 2016년 3월 14일 확인.</ref>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ref name="조선총독부 고시 제430호">[http://gb.nl.go.kr/s_img/GB_19340827_CA2290/GB_19340827_CA2290_001.GIF 조선총독부관보] 제2290호, 조선총독부고시 제430호.</ref><ref>{{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86&article_id=0000027183&section_id=103&menu_id=103 |제목=남대문 '국보1호' 지정은 역사적 수치 |저자=남준기 |출판사=내일신문 |날짜=2005-11-08}}</ref>
<!--예비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0073066-->
|제목 = 남대문 '일제 잔재' 주장 근거 없다
|저자 = 이순우 시민기자
|날짜 = 2005-11-10
|뉴스 =
|출판사 = 오마이뉴스
|확인날짜 = 2016-03-21
}}</ref>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ref name="조선총독부 제령 제6호">[http://gb.nl.go.kr/s_img/GB_19330809_CB0001/GB_19330809_CB0001_001.GIF 조선총독부관보] 제1975호 호외. 1934년 8월 9일자. 제령 제6호. 2016년 3월 14일 확인.</ref>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ref name="조선총독부 고시 제430호">[http://gb.nl.go.kr/s_img/GB_19340827_CA2290/GB_19340827_CA2290_001.GIF 조선총독부관보] 제2290호, 조선총독부고시 제430호.</ref><ref name="내일20051108">{{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6&aid=0000027183
|제목 = “남대문 ‘국보1호’ 지정은 역사적 수치”
|저자 = 남준기 기자
|날짜 = 2005-11-08
|뉴스 =
|출판사 = 내일신문
|확인날짜 = 2016-03-21
}}</ref>
*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ref name="경향19941115">{{뉴스 인용 |제목=「서울의 상징」 남대문이 1위/「가나아트」지 설문 |출판사=경향신문 |날짜=1994-11-15}}</ref>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11500329113013&ed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4-11-15&officeId=00032&pageNo=13&printNo=15256&publishType=00010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남대문 근접 감상' 계획 무산… 문화재委 "안전위협" 불허 |출판사=동아일보 |날짜=2000-02-09}}</ref>
|제목=「서울의 상징」 남대문이 1위/「가나아트」지 설문
|저자 = 이용 기자
|날짜 = 1994-11-15
|뉴스 =
|출판사 = 경향신문
|확인 = 2016-03-21
}}</ref>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ref name="">{{뉴스 인용
|url =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98381
|제목 = 崇禮門(숭례문)
|저자 = 송종복 기고
|날짜 = 2015-12-09
|뉴스 =
|출판사 = 경남매일
|확인날짜 = 2016-03-21
}}</ref>
<!--확인이 필요함 <ref>{{뉴스 인용 |제목='남대문 근접 감상' 계획 무산… 문화재委 "안전위협" 불허 |출판사=동아일보 |날짜=2000-02-09}}</ref>-->
*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ref name="연합-20050527-1">{{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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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날짜 = 2016년 3월 21일
}}</ref>
*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ref name="경향20060303">{{뉴스 인용 |제목=숭례문 활짝 열렸다-99년 만에 중앙통로 개방...3일부터 출입 |출판사=경향신문 |날짜=2006-03-01}}</ref>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1&artid=200603031828492
|제목 = 빗장 푼 숭례문…100년 만에 ‘활짝’
|저자 = 김대진 기자
|날짜 = 2006-03-03
|뉴스 =
|출판사 = 경향신문
|확인날짜 = 2016-03-21
}}</ref>
*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ref name="cha.go.kr" /><ref name="연합20080210-1">{{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953859
|url =
|제목 = `국보 1호' 숭례문 불..소방 당국방화 진화용의자 목격(종합)
|저자 = 이세원 기자
|날짜 = 2008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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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날짜 = 2016년 3월 20일
}}</ref>
*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 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 <ref name="경향20090203">{{뉴스 인용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31721135&code=960201
|제목 ='국보1호 원형'‘국보1호 원형’ 훼손 부재 재활용에 달렸다 |출판사=경향신문 |날짜=2009-02-03}}</ref>
|저자 = 이기환 <!--선임-->기자
|날짜 = 2009-02-03
|뉴스 =
|출판사 = 경향신문
|확인날짜 = 2016-03-21
}}</ref>
* [[2010년]] [[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ref name="연합20100210">{{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116263
줄 153 ⟶ 211:
|확인날짜 = 2016년 3월 20일
}}</ref>
* [[2013년]] [[5월 1일]] : 숭례문 관리단체를 종전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장으로 변경<ref>[http://gwanbo.moi.go.kr/gwanbo/servicePdfDownload.gz?cmd=&ebookSeq=00000000000000001365744448676000&sPage=&keyword=&gzType=GZT00T&requestType= 관보 제17996호] 2013년 4월 16일자. 43쪽. 문화재청고시 제2013-38호. [http://jikimi.cha.go.kr/servlet/DownloadGosi?idNum=TlRRNA==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관리단체 변경 고시》]</ref><ref name="연합20121017">{{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877220
|제목 = 문화재청이 숭례문 직접 관리하기로
|저자 = 김태식 기자
|날짜 = 2012-10-17
|뉴스 =
|출판사 = 연합뉴스
|확인날짜 = 2016-03-21
}}</ref>
* [[2013년]] [[5월 4일]] : 숭례문 공식 개방 <ref name="연합20130504">{{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241339
줄 173 ⟶ 239:
 
== 특징 ==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출처 필요|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로 평가된다.<ref name="cha.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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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하듯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 (관료)|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남겨져 있다.<ref name="한겨레20080212">{{뉴스 인용
|제목=양녕이url 현판 썼다는데 과연 그럴까?|url=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9138.html|저자=전진식|출판사=한겨레|날짜=2008-02-12}}</ref>
|제목 = 양녕이 현판 썼다는데 과연 그럴까?
|저자 = 전진식 기자
|날짜 = 2008-02-12
|뉴스 =
|출판사 = 한겨레
|확인날짜 = 2016-03-21
}}</ref>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일반적인 문들의 현판들은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ref name="동아19980407">{{뉴스 인용
|제목=숭례문url 현판 「세로쓰기」일까|url= http://wwwnews.donga.com/fbin3/moeum?n=j$45&a=v&l=21&id=199804070029|저자=이광표|출판사=동아일보|날짜=1998-04-07}}<all/ref>19980407/7335366/1
|제목 = [문화유산 돋보기답사]숭례문현판 왜 「세로쓰기」일까
|저자 = 이광표 기자
|날짜 = 1998-04-07
|뉴스 =
|출판사 = 동아일보
|확인날짜 = 2016-03-21
}}</ref>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로 인해 편액의 손실을 우려해 숭례문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판이 추락하여 그 충격으로 일부 목재편에 탈락, 결실 및 부분 균열이 발생되었다. 또한 현판의 테두리목도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고 일부 결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해당 결실편을 현장에서 95% 정도 확보함에 따라 원형 보존처리에는 이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리한 편액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되어 보존처리되었다. 이송 후 관련 문헌과 자료를 검토함과 동시에, 그간 [[국립고궁박물관]]의 사전응급조사 및 자문결과를 기초로 과학적 상태조사([[X선]], [[적외선]] 촬영 등)를 거쳐 손상부분의 접착복원 등 숭례문 현판의 정밀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며 처리기간은 6개월 이상 소요예정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은 총 38조각이 났으며, [[2009년]] [[5월]] 말에 복원완료 예정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2009년]] [[7월 3일]]에는 현판이 완전히 복원되었다.<ref name="연합20090703-복구">{{뉴스 인용
이어 [[2009년]] [[7월 3일]]에는 현판이 완전히 복원되었다.<ref name="recovered">{{뉴스 인용|제목=복원된 숭례문 현판|url=http://www.ytn.co.kr/_comm/pop_mov.php?s_mcd=0103&s_hcd=&key=200907031455012520|저자=이문석|출판사=[[YTN]]|날짜=2009-07-03}}</ref> 기존의 '숭'(崇)자 부분에 갈라진 부분도 메웠으며,<ref name="recovered"/> 고증을 통해 정확하다고 밝혀진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기존의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 등)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ref name="recovered"/> 테두리목은 연결부위가 심하게 파손된 관계로 다시 걸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하여 완전히 교체했으며,<ref name="recovered"/> 최고라 일컬어지는<ref name="recovered"/>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인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인 홍창원이 참여했고<ref name="ministry">{{뉴스 인용|제목='숭례문 현판' 옛 모습 되찾다|url=http://korea.kr/newsWeb/pages/brief/categoryNews2/view.do?newsDataId=148672885|저자=문화재청|출판사=문화재청|날짜=2009-07-03}}</ref>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여<ref name="recovered"/><ref name="ministry"/> 복원의 의미를 높였다.
|url = http://www.ytn.co.kr/_ln/0103_200907031455012520
|제목 = 복원된 숭례문 현판
|저자 = 이문석 기자
|날짜 = 2009-07-03
|뉴스 =
|출판사 = YTN TV
|확인날짜 = 2016-03-21
}}</ref> 기존의 '숭'(崇)자 부분에 갈라진 부분도 메웠으며, 고증을 통해 정확하다고 밝혀진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기존의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 등)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테두리목은 연결부위가 심하게 파손된 관계로 다시 걸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하여 완전히 교체했으며, 최고라 일컬어지는 <ref name="연합20090703-복구"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인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인 홍창원이 참여했고<ref name="정책브리핑20090703-정부">{{웹 인용
|url = http://www.korea.kr/policy/mainView.do?newsId=148672885
|제목 = ‘숭례문 현판’ 옛 모습 되찾다
|저자 = 문화재청
|날짜 = 2009-07-03
|웹사이트 = 정책브리핑
|출판사 = 문화체육관광부
|확인날짜 = 2019-03-21
}}</ref>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여<ref name="연합20090703-복구" /><ref name="정책브리핑20090703-정부" /> 복원의 의미를 높였다.
 
== 숭례문 방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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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다.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벌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다. [[2008년]] [[8월 15일]]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구현장을 공개했다.<ref>{{뉴스 인용|제목name=문화재청,"연합20121017" 숭례문 복구현장 공개관람 실시|url=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Press/YIBW_showPress.aspx?contents_id=RPR20080811014600353|출판사=연합뉴스|날짜=2008-08-11}}</ref><ref name="노컷"20080321>{{뉴스 인용|제목=숭례문 복구현장 일반공개 시작|url=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08491.|출판사=노컷뉴스|저자=한채호|날짜=2008-08-15}}</ref>
|url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08491
|제목 = 숭례문 복구현장 일반공개 시작
|저자 = 한재호 기자
|날짜 = 2008-08-15
|뉴스 =
|출판사 = 노컷뉴스
|확인날짜 = 2016-03-21
}}</ref>
 
=== 복구 ===
복구현장에서 숭례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울타리([[일제강점기]]에 설치됨)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벙커 (깊이 2m, 너비 2m, 길이 3m 가량)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를 철거하기로 했다.<ref>[
{{뉴스 인용
|url =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080806175122552&cp=sbsi
|제목 = 숭례문 복구현장서 지하벙커 발견…철거 결정]《SBS》2008.08.06 17:51</ref>
|저자 = 이대욱 기자
|날짜 = 2008-08-06
|뉴스 =
|출판사 = SBS TV
|확인날짜 = 2016-03-21
}}</ref>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 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 위에 옛 성곽 자리를 표시했다.<ref name="연합20080814 ">{{뉴스 인용|제목=숭례문-옛 서울 성곽 자리 도로바닥 그림 형태로 되살려|url=http://www.kukinews.com/news/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001719&cp=nv|출판사=쿠키뉴스|날짜=2008-08-14}}</ref>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222810
|제목 = 그림으로 살아난 서울성곽
|저자 = 서울=연합뉴스 <<문화재청 제공>>
|날짜 = 2008-08-14
|뉴스 =
|출판사 = 연합뉴스
|확인날짜 = 2016-03-21
}}</ref>
 
문화재청에서는 국민적 정서를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불타 소실된 자리에 숭례문의 잔해를 기초로 하여 숭례문과 최대한 유사하도록 형태를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2013년]] [[5월]] 복구 준공식을 목표로 하여 [[2013년]] [[4월 29일]] 공사 완료하였다.
 
화재로 무너진 숭례문 복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없어진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각각 복원됐다. 동쪽 계단은 폭이 5m(종전 2.9m)로 늘어난다. 발굴 조사와 옛 자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반은 이전보다 30 ~ 50㎝ 낮아졌으며, 1층 마루는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뀐다. 화재 직전 공장 제품이었던 지붕 기와는 전통 기와로 대체됐으며, 용마루 길이도 16.6m(종전 15.7m)로 늘어났다. 잡상은 1층이 7개로 하나 줄었으며, 2층은 9개로 같다.<ref name="연합뉴스미디어랩bf20130402">{{뉴스 인용
|제목=숭례문,url 화마가 남긴 상처 딛고 우뚝 서다|url= http://www.yonhapnews.co.kr/medialabs/special/sungnyemun/index.html|출판사=연합뉴스|날짜=2013-04-01}}</ref>
|제목 = 숭례문 복구 대장정 5년 3개월만에 대단원<!--'화마가 남긴 상처 딛고 우뚝 서다'가 제목이었으나, 이후 바뀐것으로 보임.-->
|저자 = 연합뉴스 Media Lab
|날짜 =
|웹사이트 =
|출판사 = 연합뉴스
|확인날짜 = 2013-04-02
}}</ref>
 
== 논란 ==
=== 국보 1호 변경 논란 ===
[[1996년]] 11월,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 서울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다. 문화재전문가 144명 (문화재위원 49명, 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다.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시민·학생 상반의견/국보 1호 어떻게 할것인가 |출판사=한국일보 |날짜=1996-11-23}}</ref><!--2016-03-21 문화일보 DB콘텐츠부 독자정보센터를 통해 DB화 되어있지는 않은 기사로, 위 내용이들어 있음을 확인함. 단, 전체기사를 확인하여 비교한 것은 아니므로 확인표시는 하지 않음.-->
[[2005년]] 11월, [[대한민국 감사원|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으며,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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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경향신문
|확인날짜 = 2016년 3월 21일
}}</ref><ref name="한겨레2005-11-08">{{뉴스 인용
}}</ref><ref>{{뉴스 인용 |url=http://www.hani.co.kr/kisa/section-002001000/2005/11/002001000200511081039697.html |제목=국보 1호 남대문 그 영광과 비애 |출판사=한겨레 |저자=김태식 |날짜=2005-11-08}}</ref>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에 남대문을, 보물 2호에 동대문을 각각 지정하였다.<ref name="조선총독부 제령 제6호" /> 해방 이후에도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되었다.
|url = http://www.hani.co.kr/kisa/section-002001000/2005/11/002001000200511081039697.html
|제목 = 국보 1호 남대문 그 영광과 비애
|출판사 = 한겨레
|저자 = 김태식 기자
|날짜 = 2005-11-08
|확인 = 2016-03-21
}}</ref>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에 남대문을, 보물 2호에 동대문을 각각 지정하였다.<ref name="조선총독부 제령 제6호" /> 해방 이후에도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되었다.
 
==== 변경 반대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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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네티즌들은 "국보 1호가 불에 탄 것도 안타까운데 그 옆에 쓰레기장을 만들겠다니 정말 황당한 발상"이라며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다. 일부 네티즌들은 "차라리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 옆에 쓰레기장을 지어라"며 비꼬았다. 이러한 네티즌들의 반응에 대해 중구청 관계자는 "문화재청도 남대문시장의 쓰레기를 처리할 합리적인 방안이란 점을 인정했다"며 "광장을 조성하면 시각적으로도 숭례문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대문시장]] 일부 상인들조차 "서울시와 중구가 이 땅을 문화 공간으로 개발하겠다는 방침을 뒤집었다"며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커지게 되었다.<ref name="경향20091012">{{뉴스 인용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121031381&code=940100
|제목 = 숭례문 옆 지하 쓰레기집하장 '시끌'
|출판사 =[[ 경향신문]]
|날짜 =2009-10-12|확인일자=2009-10-12}}</ref> 2009년 10월 12일
|확인일자 = 2009-10-12}}</ref><ref name="연합20091011">{{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910147
|제목 = 숭례문 옆 지하쓰레기장 논란 속 강행
|저자 = 김태균 기자
|날짜 = 2009년 10월 11일
|뉴스 =
|출판사 = 연합뉴스
|확인날짜 = 2016년 3월 21일
}}</ref><ref name="SBS TV20090923">{{뉴스 인용
|url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647416&plink=OLDURL
|제목 = '국보1호' 숭례문 옆에 쓰레기 집하장이 왠말?
|저자 = 장선이 기자
|날짜 = 2009년 9월 23일
|뉴스 =
|출판사 = SBS TV
|확인날짜 = 2016년 3월 21일
}}</ref>
 
=== 부실 복원 논란 ===
복원 공사를 마친 숭례문에서 [[단청]]이 갈라지는 현상이 [[2013년 11월]] 발견되었다. [[아교]]의 코팅 재료로 [[들기름]]과 [[합성수지]]를 쓰면 벗겨짐을 막을 수 있었지만, 전통 기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동나무]] 기름 (동유)를 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통 건축에서 동유를 단청의 코팅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으며 [[문화재청]]이 실험을 한 결과 안료가 갈라지거나 벗겨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내용의 보고서도 썼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후 2013년 12월에는 숭례문 기둥에서 균열이 발견되었다. 나무를 잘 말려서 써야 하지만 급히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월]]에는 숭례문에 사용한 소나무로 삼척에서 벌목된 [[금강송]] 대신 [[러시아]]산 소나무를 썼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금강송]]은 [[강원도]]와 경북 북부 일부에서 자라는 [[소나무]](Pinus densiflora)로 독특한 기후 조건에 의해 강도가 높은 고급 소나무이다. 2014년 1월 3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숭례문 복구와 앞선 광화문 복원 공사에서 나무를 공급한 [[신응수]] 대목장이 관급 목재 빼돌리고 값싼 러시아산 소나무로 바꿔치기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법원의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신 대목장 서울 자택과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강릉 W 목재상, 광화문 안에 있는 신 대목장의 치목장(나무를 다듬는 곳) 등 5∼6곳을 압수수색했다.<ref name="연합-20140103">
{{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682774</ref>
|제목 = 삼척 준경묘 소나무와 광화문·숭례문 복원공사
|저자 = 김태식 기자
|날짜 = 2014년 1월 3일
|뉴스 =
|출판사 = 연합뉴스
|확인날짜 = 2016년 3월 21일
}}</ref>
 
문화재청은 [[연륜연대학]] 전문가 [[박원규]] 교수에게 나이테를 이용한 분석을 의뢰했고 [[국립산림과학원]]에는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숭례문에 사용된 소나무가 [[대한민국]]에서 자라는 소나무 종인 Pinus densiflora일 경우 삼척시 준경묘에서 베어낸 [[금강송]]이 맞는지 유전자 검사로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러시아에서 주로 분포하는 소나무의 종인 [[구주소나무]](구주적송,Pinus sylvestris)일 경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진위를 판명할 수 있다. 한편 나이테 분석을 통해서는 유전자 검사로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인, 같은 [[소나무]]종 목재의 원산지가 한국이 맞는지도 분석할 수 있다. [[박원규]] 교수는 [[1월 17일]] 나이테 분석을 통해 19개중 7개가 의심스럽다며 그중 2개가 가짜가 유력하고 5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인터뷰하였다<ref name="JTBC TV-20140117">[{{뉴스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024438
|제목 = 숭례문 목재 일부 나이테 달라…검사 방식 두고 논란도]
|저자 = 박성훈 기자
|날짜 = 2014년 1월 17일
|뉴스 =
|출판사 = JTBC TV
|확인날짜 = 2016년 3월 21일
}}</ref> 그리고 하루 뒤에 아내와의 점심식사를 해놓고 갑자기 교수연구실에서 [[전깃줄]]에 목을 감은채 사망했다.
 
==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