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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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포티 작전'''(Operation ''Blacklist Forty''<ref name="Edwards, pg. 11-13">{{cite book서적 인용| last=Edwards| first=Paul M.| authorlink=| title=The Korean War| publisher=Greenwood Publishing Group| series=| year=2006| doi=| isbn=0313332487}}</ref>)는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미국]]의 [[한반도]] 점령 작전의 [[코드네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본 제국]]이 항복함에 따라, 미군은 나중에 [[대한민국]]이 되는 38선 이남 한반도를 점령하고,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는 곳을 점령했던 소련과 함께 연합하여 독립되고 통일된 한국 정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들과 우호적인 정부를 만들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였고, 이후 [[한반도의 분단]]이 찾아오게 된다.<ref name="Edwards, pg. 11-13"/><ref name="Edwards, pg. 34-35">{{서적 인용 | last=Edwards| first=Paul M.| authorlink=| title=Combat operations of the Korean War: ground, air, sea, special and covert| publisher=McFarland| series=| year=2010| doi=| isbn=0786458127}}</ref>
 
== 배경 ==
1945년 8월, 미국은 [[소련]]이 [[소련 대일전 참전|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한반도 점령 지역 분할을 제안했다. [[딘 러스크]]와 [[찰스 H. 본스틸 3세]] 미군장교 2명은 한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짧은 시간의 회의 이후 8월 10일 [[북위 38도]]를 분할 구역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 상부는 이 분할선을 받아들이고 소련도 이 제안을 받아들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 체제를 지지하는 대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며, 역시 소련 또한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서 소련에게 우호적인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ref name="Edwards, pg. 11-13"/><ref name="Edwards, pg. 34-35"/><ref name="Takemae, pg. 39-40">{{cite book서적 인용| last=Takemae| first=E.| authorlink=| title=The Allied Occupation of Japan| publisher=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series=| year=2003| doi=| isbn=0826415210}}</ref>
 
== 점령 작전 ==
[[File파일:Surrender of Japanese Forces in Southern Korea.jpg|200px|thumb|left|1945년 9월 9일, 서울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조선총독부 청사]] 앞에서 일본 제국의 깃발을 강하하는 미군.]]
[[File파일:Flag map of Divided Korea (1945 - 1950).png|right|220px|thumb|1945년 9월 9일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38선 분단시킨 지도]]
 
미국은 [[미국 육군]] [[제24군단 (미국)|제24군단]] 45,000명을 점령작전에 투입했다. 한반도에 상륙한 최초의 미군은 1945년 9월 4일 [[서울]] 근처 [[김포비행장]]에 착륙한 소규모 부대였다. 9월 8일에는 [[인천]]에 [[제7보병사단 (미국)|제7보병사단]] 소속 병사 14명이 상륙했으며, 다음 날 대규모 상륙이 시작되었다. 저자 폴 M. 에드워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당시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이를 진행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의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세계대전 전후]] 결정의 거의 맡고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의 지휘관인 [[대장 (군사)|대장]]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미 일본에서 수행해야 할 작전에 떠밀렸고, 결국 이 열약한 한반도 점령작전의 지휘관을 [[중장]] [[존 하지]]에게 맡겼다. 호지는 서울 반다 호텔에 사령부를 세우고 [[점령|군사 정부]]를 수립했으며, 한국의 공식 언어를 [[영어]]로 정했으며 미국에게 호의적인 독립 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했다.<ref name="Edwards, pg. 11-13"/><ref name="Edwards, pg. 34-35"/><ref name="Takemae, pg. 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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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E. 타케메에 따르면, 미군은 점령군으로, 그리고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또한, 그는 미군이 군사적 배경과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본인의 행정 관리 능력 등으로 인해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우대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은 한반도의 여러 정치 세력과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일본 당국을 이용하여 취급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많은 한국인들의 눈에, 미국과 일본은 똑같이 나빠 보였다"라고 말했다.<ref name="Takemae, pg. 39-40"/>
 
[[File파일:USS San Francisco (CA-38) off the Korean coast, 28 September 1945.jpg|200px|thumb|1945년 9월 28일, 인천 앞바다의 [[USS 샌프란시스코 (CA-38)]]]]
 
한반도 내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는 미국과 소련 양국이 양 국에게 서로 우호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동의할 때 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 생성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협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협상이 실패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보냈다. 1947년 9월 유엔은 이 문제를 받아들어 유엔 감독 하 한국의 선거 문제와 포함에 이를 회의에 올렸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이 내린 결정은 오직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38도선 북쪽은 이를 적용받지 않거나 한국의 새로운 정부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한다고 말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38도선 이남에 선거가 열렸고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ref name="Edwards, pg. 11-13"/><ref name="Morison, pg. 1,065-1,067">{{서적 인용 | last=Morison| first=Samuel Eliot| authorlink=| title=The Oxford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 series=| year=1965| doi=| isbn=}}</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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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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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