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흥다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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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베트남 쩐 왕조의 초대 황제 [[쩐 왕조 태종|태종]](太宗)의 형인 [[진류 (베트남)|진류]](陳柳)의 아들이다. 본명은 진국준(Trần Quốc Tuấn, 陳國峻)이고, 흥도(興道)는 후에 그 공적을 칭송하여 주어진 호칭이다.
 
 
처음에는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진수도]](陳守度)에 의해서 아버지 진류가 실각당하고 조정과 대립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용이 뛰어난 인물로 후에는 장군으로 중용되었다.
 
 
[[1257년]] [[운남성]]에서 인근의 민족들을 토벌하던 몽골의 장군 우리양카다이(Uriyangkhadai, 兀良合台)가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베트남에 길을 빌려달라며 사신을 보내자, 쩐 태종은 사신을 옥에 가두었다. 쩐 흥 다오가 이 때 변경 방비의 임무를 맡게 된 것도 이 때 였다.
 
 
이에 우리양카다이는 군사를 이끌고 홍 강(紅江)과 로 강(Lo 江)을 따라 현 [[하노이]]인 탕롱(Thăng Long, 昇龍)성에 입성하였으나, 식량 부족과 기후 문제로 군사들의 사기가 위축되고 베트남을 정복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곧 철수를 시작했다. 이에 베트남 측도 이듬해 12월 동 더우 보(Dong Dau Bo, 東頭步)에서 반격을 시작했지만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몽골에 사절을 보내 화약을 맺고, 3년에 한 번 입공(入貢)할 것을 약속했다.
 
 
[[1283년]] [[원나라|원]](元)의 [[쿠빌라이 칸]]이 군대를 보내 [[참파]]를 침공하여 당시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를 함락시키고 베트남에게 참파 정벌에 동원시킬 병사를 요구하였다. 베트남 측은 이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쿠빌라이 칸은 해로를 통해 베트남 침공을 시도했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1285년]]에 다시 아들 토곤(Toghon 脫驩)을 시켜 50만 대군을 이끌게 하여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고, 위급함을 느낀 인종은 쩐흥다오를 국공(國公)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덕망있는 촌로들을 모아 항복을 할 것이냐, 항전을 택할 것이냐를 물었다. [연홍회의(延洪會議)]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1285년]]에 다시 아들 토곤(Toghon 脫驩)을 시켜 50만 대군을 이끌게 하여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고, 위급함을 느낀 인종은 쩐흥다오를 국공(國公)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덕망있는 촌로들을 모아 항복을 할 것이냐, 항전을 택할 것이냐를 물었다.[연홍회의(延洪會議)]
 
 
쩐 흥 다오가 이끄는 쩐 왕조의 군대는 토곤의 몽골군을 맞아서 열심히 싸웠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수도인 탕 롱(Thang Long)성이 함락되고 태상황 태종과 인종은 겨우 탕 롱을 탈출해서 타인 호아(Thanh Hoa 淸化)로 도망쳤다. 다행히도 이내 다시 전열을 수습해서 탕롱을 점령한 원군을 사방에서 공격해서 수세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때 쩐흥다오는 '''"항복을 하려거든 신(臣)의 목부터 먼저 베소서!"'''라 말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는 《병서요략(兵書要略)》을 엮고나서 <격장사문(檄將士文)>이란 글을 지었는데, 이 글을 보면 몽골과의 전쟁에 임하는 그의 진중하고 비장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인용문|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해둔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라고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逢蒙: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이나 후예(后羿: 봉몽의 스승)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렬(必烈 : 쿠빌라이)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 : 쿠빌라이의 아들인 토곤)의 살점을 고가(藁街 :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던 거리,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에서 썩게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너희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이 격문을 읽은 병사들의 사기는 다시 솟아올랐고, 1285년 6월, 다시 탕롱성을 탈환하였다. 결국 토곤은 군대를 베트남에서 철수시켰다.
 
 
[[1287년]] 말 원의 군대가 다시 처들어오자 쩐흥다오는 군사를 탕롱성에서 철수시키고 원의 보급선을 격파시킨 다음 바익당강 바닥에 말뚝을 박고 썰물이 될때까지 기다린 후 원나라의 함선을 궤멸([[바익 당 전투]])시켰다. 이에 원의 군대는 퇴각하였고, 이후 인종은 사죄의 뜻으로 원에 포로를 되돌려보냈다.
 
 
그는 [[1300년]]에 '''"군대는 부모자식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는데, 임종 때 황제가 그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참파왕 체만은 [[1306년]]에 인종의 딸과 정략 결혼을 하고 양국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1307년]] 체만이 갑자기 죽고, 베트남과 참파는 다시 항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저작으로는《병서요략(兵書要略)》,《만법종비전서(萬劫宗秘傳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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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욱, <동남아시아사-전통시대>
* 최귀묵, <베트남 문학의 이해>
 
{{위키공용분류|Tran Hung D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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