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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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파일:Albrecht Dürer 084b.jpg|thumb|막시밀리안 1세]]
| 그림 = Albrecht Dürer - Portrait of Maximilian I - Google Art Project.jpg
| 이름 = 막시밀리안 1세
| 본명 =
| 출생일 = 1459년 3월 22일
| 출생지 = [[인너 오스트리아]] [[비너노이슈타트]]
| 사망일 = 1519년 1월 12일
| 사망지 = [[오버외스터라이히 주]] [[벨스]]
| 시호 =
| 작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br/> [[독일의 군주]]
| 재위 = 1486년 2월 16일–1519년 1월 12일
| 대관식 = 1486년 4월 9일
| 전임자 =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
| 후임자 = [[카를 5세]]
| 작위2 = [[오스트리아의 군주|오스트리아 대공]]
| 재위2 = 1493년 8월 19일 - 1519년 1월 12일
| 전임자2 =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5세]]
| 후임자2 = [[카를 1세]]
| 배우자 = [[부귀공 마리]] <br/> [[안 드 브르타뉴]] (무효) <br/>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 자녀 =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 <br/>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 (1480년)|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
| 왕가 = [[합스부르크 가문]]
| 아버지 =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
| 어머니 = [[레오노르 드 아비스]]
}}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년]] [[3월 22일]] ~ [[1519년]] [[1월 12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493년]] ~ [[1519년]])이다. 교묘한 혼인 정책과 외교로 영토를 확장하여 [[합스부르크 가]] 번영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용담공 샤를]]의 딸 [[부르고뉴 여공 마리]]와 결혼하여 그 [[공국]]을 차지하는 한편, [[에스파냐]]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왕위 계승을 꾀하고, [[오스트리아]]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는 [[인문주의]]의 신봉자로 학자와 문인을 우대하였다. 기사도 정신이 넘쳐기에 별칭으로 독일 최후의 기사(Deutschland, der letzte Ritter)로 불렸다.
 
== 초기 생애 ==
145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공주 [[엘레오노라레오노르 드 아비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여공인 마리와 결혼해 부르고뉴의 섭정이자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1479년 긴나르 전투에서 [[루이 11세]]의 프랑스군을 격퇴하는등 합스부르크가가 새로이 확보한 영토인 저지대 국가들을 무사히 지켜냈다. 1482년 마리가 사망하자 네덜란드 의회가 자신의 장남 필리프의 섭정 노릇을 하는 것을 용인하였고 그와중에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아라스 조약]]을 체결해 딸 마르가레테와 루이 11세의 외아들인 샤를과의 약혼을 동의했다. 1485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아들의 섭정권을 얻어내지만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반란군과 계속되는 내전을 치뤄야 했다.
 
그해에 헝가리의 [[마티아슈 1세 코르비누스]]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수도 빈을 포함한 영토 대부분이 점령당하고 부친 프리드리히 3세가 도주해야하는 굴욕을 당했다. 1년뒤인 1486년 아버지로부터 공동 통치자로서 4월 9일 아헨에서 독일왕에 선출되었고 카스티아, 영국, 브르타뉴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의 반란군을 압박하기 시작했으며 1490년 부르타뉴 여공인 [[안 드 브르타뉴|안]]과 결혼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샤를 8세]]의 [[브르타뉴]] 침공으로 불발되었고 샤를 8세의 약혼녀로 보내진 딸 마르가레테가 돌아왔다. 그와중에 티롤의 백작인 사촌 지기스문드로부터 은광과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한 티롤을 양도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일대를 휩쓸던 헝가리군이 마티야슈 1세의 사망을 위세가 꺽어지자 여세를 몰아 빈을 포함한 빼앗긴 오스트리아 일대를 탈환하려고 1년 후인 1491년 헝가리 왕위 요구자로 헝가리 국왕을 겸하게 된 [[보헤미아 왕국]]의 [[블라디슬라프 2세]]와 대립했고 그결과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해 만일 블라디슬라프 2세가 후사없이 서거한다면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로 넘어오게끔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