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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우드의 노동철학 ==
=== 산업별 노동조합 ===
헤이우드는 서부광부연맹(WFM)에 가입하기 전부터 사람들이 고생스럽게 일하는 체제가 부당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1887년 [[헤이마켓 사건|헤이마켓]]의 지도부가 처형된 것이 자기 삶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당시 가장 큰 노동조직인 [[노동기사단]]에 가입하게 된다.<ref>Carlson, ''Roughneck,'' pg. 36</ref> 헤이우드는 위험한 갱도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칵시의 행군]]에 참여했다. 그 자신도 광산에서 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그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동료 광부들 뿐이었다. 1896년 WFM의 [[에드 보이스]]가 광부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고 헤이우드는 급진적 노동조합주의를 돈오했고 또한 기꺼이 받아들였다.<ref>Carlson, ''Roughneck,'' pp. 50–52.</ref>
 
헤이우드는 [[미국노동총연맹|미국노총]](AFL)에 대해 회의적인 보이스의 시각도 공유했다. 헤이우드는 자기가 보기에 AFL의 노조 간부들은 노동의 전쟁을 충분히 지원하고 있지 않았다. 예컨대 헤이우드는 AFL 총재 [[새뮤얼 곰퍼스]]가 헤이마켓 수감자들을 구명하기 위해 일리노이 주지사 [[리처드 제임스 오글스비]]를 만나 처음 한 말, “나는 내 일생에 걸쳐 지탄받을 자들의 원리와 방법을 멀리해 왔습니다”를 매우 아니꼬워했다.<ref>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73.</ref>
 
곰퍼스는 노동자들이 각자의 기술에 따라 나뉘어야 한다는 [[직종별 노동조합]]의 지지자였고,<ref name=cahn-137-169 /> AFL은 기술이 따로 없는 비숙련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을 괄시했다.<ref name=carlson-80>Carlson, ''Roughneck,'' pg. 80.</ref> 곰퍼스는 1900년 [[전미시민연맹]] 초대 부총재가 되었는데, 이 단체는 “자본과 조직된 노동 사이의 조화와 공조를 함양하기 위함”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ref>Cahn, ''A Pictorial History of American Labor,'' pg. 204.</ref> 하지만 헤이우드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경험하며 이와는 다른 노조철학, 일종의 [[산업별 노동조합]]이 정의구현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888년 직종별로 조직화된 기관차 화부들이 일을 멈추지 않아 기업주들이 철도 엔지니어들의 파업을 분쇄하는 것을 결과적으로 돕게 된사건이 있자 이런 생각은 더욱 구체화된다.<ref name=carlson-44>Carlson, ''Roughneck,'' pg. 44.</ref>
 
[[File:Bill haywood headshot side.jpg|thumb|빌 헤이우드. 촬영일자 불명]]
 
[[유진 데브스]]는 당시 기관차 화부들의 노조 지도부였는데, 사임하고 새로이 철도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미철도노조]](ARU)를 설립한다.<ref>Carlson, ''Roughneck,'' pg. 45.</ref> 1894년 6월 ARU가 [[풀먼사 파업]]에 연대하자 미국 전역의 철도교통이 거의 마비되었다. 산업별 노동조합의 효과는 그 시작부터 매우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었다.<ref>Cahn, ''A Pictorial History of American Labor,'' 174.</ref> 시카고 한 곳에만 14,000 명의 군대와 2600명의 보안관들이 배치되는 등 정부가 사측 편을 들며 대규모로 개입하여 풀먼사 파업은 결국 분쇄된다.<ref>A History of American Labor, Joseph G. Rayback, 1966, pages 202–203.</ref> 데브스는 AFL의 열차형제단에 제휴를 요청하는 한편 열차관리자협회에 “모든 노동자들의 위치가 전과 같이 복구되면 그들은 한꺼번에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나, 그렇지 아니할 경우 총파업이 있을 것”이라는 전언을 보냈다.<ref name="Big Bill Haywood 1929, pp. 77-78">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1929, pp. 77–78.</ref>
 
그러나 AFL 지도부는 ARU가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을 보고 경쟁 조직의 곤경이 자기들의 세를 넓힐 기회라고 생각했다. AFL은 가맹된 모든 노조에게 ARU를 돕지 말 것을 지시한다. 헤이우드는 이를 “배반행위(treachery)”이며 “배신행위(double-cross)”라고 받아들였다.<ref name="Big Bill Haywood 1929, pp. 77-78"/> AFL 지도부로서는 남의 조직을 위해 자신들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 터이지만, AFL은 파업을 최소 무승부로 끝내기 위한 도움마저 거부했다. 풀먼사 파업에서 자기 업무라인과 관할범위를 넘어서 함께 자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힘은 헤이우드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때의 깨달음이 “거대한 [[틈새빛살]]”이었다고 묘사했다.<ref name=carlson-44 />
 
1903-05년 크리플크리크에서 WFM의 파업이 실패하자 헤이우드는 산업별 노동조합 원칙은 옳으나 노동자들의 연대가 부족하여 실패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WFM의 광부들은 노조의 혜택을 자신들이 채굴한 광석을 처리하는 공장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시키려고 한 바 있다. 정부가 ARU를 박살내자 철도노동자들은 다시 AFL의 방식대로 직종별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풀먼사 파업에 참여했던 바로 그 노동자들이 크리플크리크 광산의 광석을 공장으로 운송하고, 또 그 공장 노동자들은 광석을 처리함으로써 광부들의 파업이 실패하는 데 결과적으로 기여하게 된 것이다. 헤이우드는 철도노동자들이 이 짜증나는 상황의 양쪽 끝에 연결되어 있는 셈이라고 불평했다. “노동조합들이 광산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만 없었다면, 3년째 끌고 있는 이 투쟁은 3주만에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도 했다.<ref name=carlson-80 /> 그렇다면 이 상황에 대한 (헤이우드가 보기에) 명백한 해결책은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노조 아래 조직화시켜 고용주들에 대하여 일제히 집합적 행동을 취하는 것 뿐이다. WFM의 전투적 분자들은 AFL을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이 아니고 “미국노동총분열(American ''Separation'' of Labor)”이라고 비꼬아 불렀다.<ref>Carlson, ''Roughneck,'' pg. 81.</ref> 이러한 비판은 메아리가 되어 이후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함성으로 이어지게 된다.<ref>''A Pictorial History of American Labor,'' pg. 201.</ref>
 
=== 혁명적 윤리 명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