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3번째 줄:
== 개요 ==
[[파일:八道総図.jpg|thumb|right|400px|《신증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
조선조 전기에 중앙집권화느금
조선조 전기에 중앙집권화가 강화하면서 조정은 각지의 정보를 반드시 제대로 파악해야 해서 각지의 연혁·토지·호구·성씨·인물·물산·문화유적 정보를 총람할 지리지 편찬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조선 세종|세종]] 시대에 이르러 본격화한 지리지 편찬은 《세종실록》지리지 부분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세종조에 편찬된 지리지로서는 유일하게 「경상도지리지」만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전하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양성지]]가 주도하여 시작한 《팔도지리지》편찬이 [[조선 성종|성종]] 9년([[1478년]])에 완료되었으나 이것은「경상도속찬지리지」만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은 이 《팔도지리지》를 토대로 [[서거정]]의 《[[동문선]]》에 수록된 시문을 합한 형태로 편찬됐다. 처음에는 [[훈구파|훈구 세력]]들이 중심이 되었다가 후에 [[김종직]]·[[최부]]를 위시해 [[사림파|사림 세력]]도 편찬에 합류한 점에서 《동국여지승람》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협력해 간행한 지리지라는 의의가 있다. [[조선 중종|중종]]이 즉위하고서 이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라고 명령하자 [[이행 (조선)|이행]], [[윤은보]], [[홍언필]]이 중심이 되어 [[조선 중종|중종]] 25년([[1530년]])에 '새로 증보했다'는 뜻의 '신증(新增)'을 붙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