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상호방위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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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브릭스 대사와 회동을 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였는데, 당시는 미국 주도로 휴전 협정이 진행되고 있던 터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앞서 안정적인 국가 안보를 위해 미국에 상호 방위 조약을 요구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양자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던 나라는 [[필리핀]] 밖에 없었으며,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외에 [[영국]], [[일본]], 필리핀 밖에 없다. 영국의 경우 미국의 핵기술을 제공하기 위한 조약이었고, 일본은 재무장 금지와 맞물려 있는 조약이다.<ref> 박성현, 〈일본을 벗기다 해설〉 《이승만의 일본을 벗기다》 (두두리, 2010년)</ref>
 
상호 방위 조약에 대한 진전이 미미하자 이승만은 [[6월 18일]] 약 2만 5천명의 반공 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시켰다. 휴전협정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조치였다.조치였는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을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력히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에게 '약속 파괴'라며 비난했고, 덜레스도 마찬가지 의도로 '이승만 제거'의 필요성을 검토하기도 했다.<ref> 차상철,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동맹〉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권(책세상, 2006년). 269~270쪽. </ref>
 
[[1953년]] [[8월 3일]]부터 협상에 들어가 [[1953년]] [[8월 8일]] 그 최종안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가조인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크게 만족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