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르네 에베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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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자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며, [[자코뱅당]]의 열혈 지지자가 되었다. [[1790년]] 르 페르 뒤셴(인기 희극인)이라는 필명으로 언론과 칼럼을 기고하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노골적이고 강렬한 정치풍자 글을 썼다. [[1790년]] [[11월]] 자신의 재산을 투자해서 '페르 뒤셴 (Le Père Duchesne)'을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귀족과 성직자 계층의 타락과 차별적인 대우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그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지적하였으나, [[1792년]] 봄부터는 국왕 [[루이 16세]]와 왕족들에 대한 맹렬한 공격적 논조를 펼쳤다.
 
인권과 시민권 연구 모임인 [[코르들리에 클럽]]에 가입하였으며 이내 [[코르들리에 클럽]]의 영향력있는 회원이 되었다. 그는 입헌군주제 조차도 반대하여, 혁명 코뮌의 대의원이 되어 [[1792년]] [[8월 10일]]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린 시민 봉기 계획을 도왔다. 1792년 가을부터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이성(理性)의 사원'으로 바꾸었으며, 2,000여 개의 다른 [[가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시설을 파괴하거나 이성 클럽의 장소장소로 바꿔버렸다. 또한 그해 [[12월]] 그는 파리의 코뮌 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되고, 이때 자코뱅당과 자코뱅클럽에 가입하였다.
 
[[지롱드파]] 추방과 [[자코뱅파]]의 독재에 공헌하고 공포 정치의 유지와 [[기독교]]를 중지하고 “이성의 숭배”라고 칭해지는 합리주의적인 제전을 실행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이신론]]의 형태였지만 신의 존재를 믿었고, 에베르는 성직자들 역시 기존 왕정과 봉건체제에서 종교, 도덕적 권위를 빙자해 민중을 약탈하는데 기여했다며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