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사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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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침략'''(臺灣侵略) 또는 '''모란사 사건'''({{llang|zh|牡丹社事件}})은 [[1874년]] 청과 일본 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54명의 [[류큐국]]의 표류한 [[류큐민족]]들을 타이완 토착민들이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 조정은 살해된 류큐 사람들에 대한 보상금과 타이완 점령지에 일본군이 설치한 시설물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다. 이 사건은 류큐에 대한 기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류큐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인정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 배경 ==
[[류큐 왕국]]은 [[에도 시대]]에는 [[일본]] [[사쓰마 번]]과 중국 대륙의 [[청나라]] 사이에서 양속 관계에 있었고, 일본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귀속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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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원주민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자 조난자들은 마을에서 도주를 했고, 원주민들은 도망자를 적으로 간주하여 차례로 54명을 참수하는 ‘[[미야코 섬 조난 사건]]’을 일으킨다. 생존자 12명은 [[한족]] 이민자에게 구조되었고, [[대만부]]의 보호를 받으며 [[복건성]]의 [[복주]]를 통해 [[미야코 섬]]으로 돌려보내졌다.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에게 사건의 배상 등을 요구했지만, 청나라 정부는 관할 외 지역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부했다. 이듬해 1872년 류큐를 관할하고 있던 [[가고시마 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는 책임 추궁을 위해 일본 정부에게 출병을 건의했다. 1873년에는 [[빗추 국]] [[아사쿠치 군]] 카시와지마 촌(현재의 [[오카야마 현]] [[구라시키 시]])의 선박이 대만에 표류하다가 승무원 4명이 약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ref name=mori>毛利(2004)</ref> 이에 따라 정부 안팎에서 대만 정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 개전 ==
[[미야코 섬]] 주민의 대만 실종을 알게 된 [[청나라]] [[샤먼]] 주재 미국 총영사 [[샤를 르 장드르]]는 주일 미국 공사 [[찰스 드롱]]을 통해 “야만인을 징벌해야 한다”며 [[일본]] [[외무성]]을 옹호했다. 외무경인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드롱의 중개를 통해 샤를 르 장드르와 회담을 가졌고, 내무경인 [[오쿠보 도시미치]]도 르 장드르의 의견에 주목하여 르 장드르는 고문으로 외무성에 고용되게 되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조선]] 출병을 둘러싼 [[정한론]] 등으로 갈등이 있었고, 가바 야마 스케노리와 [[가고시마 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도 [[사쓰마 번]]의 대만 출병을 건의했다. 이러한 강경 의견의 배경에는 [[폐번치현]]에 의해 실직한 40만명에서 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족들의 불만의 해소할 배출구를 찾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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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6년 정변]]에서 [[메이지 천황]]의 칙령은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이유로 한 ‘정한’의 연기일 뿐이어서 러시아와 국경이 확정되면 [[정한론|정한파]]의 요구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변으로 하야한 소에지마 대신 외교를 담당하게 된 오쿠보로서는 조선보다 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대만 출병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 전투 ==
[[파일:Tsugumichi Saigo 2.jpg|140px|thumb|사이고 쓰구미치]]
타이완 출병에 대해서는 정부 내부나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와 미국 공사 드롱의 후임인 존 빙햄(John Bingham) 등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 특히 참의 [[기도 다카요시]] 등의 조슈 번 계열의 인사는 [[정한론]]을 부정하면서, 대만에 해외 파병을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반대의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4월 18일]], 기도 다카요시는 참장직에 사표를 제출하고 하야했다. 따라서 정부는 일단 파병 중단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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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대만 남부에 상륙하여 대만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분쟁이 생겼다. [[5월 22일]], 대만 서남부의 사료 항(社寮港)에 전군을 집결시키고, 사이고의 명령에 의해 본격적인 진압을 시작했다.<ref name=mori/> [[6월 3일]]에는 무단사(牡丹社) 등 사건 발생 지역을 제압하고 현지의 점령을 계속했다. 전사자는 12명이었다.<ref name=mori/> 그러나 현지 군은 열악한 위생 상태 속에서 [[아열대]] 지역의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피해가 확산되어 조속한 해결이 필요하게 되었다. [[말라리아]] 창궐로 인해 561명의 병력이 병사했다.<ref name=mori/> 또한 청나라는 일본의 행동에 항의하면서 철군을 요구했다.
 
=== 협상 ===
메이지 정부는 이 출병 때 청나라에 통지를 하지 않았고, 또 청나라 내부의 이권을 가진 열강에도 통지나 교섭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종종 분쟁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실책이었다.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 영국의 주일 대사 파크는 당초 일본의 군사 행동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 후 영국 공사 [[토머스 프랜시스 웨이드|웨이드]]의 주선으로 화의가 진행되어, 8월 전권대신으로 [[오쿠보 도시미치]]가 베이징에 부임하여 청나라 정부와 협상을 했다. 오쿠보는 르 장드르와 프랑스인 법학자 [[쿠스타브 브아소나드]]를 고문으로 대만 문제를 협상하였고<ref name=toyama>遠山(1979)p.113</ref>, 주된 교섭 상대는 총리아문 대신인 [[혁흔|공친왕]]이었다.<ref name=mori/>
 
회담은 난항을 겪었지만, 웨이드의 중개와 이홍장의 유화론도 있었다. [[10월 31일]], ‘청일 양국 호환 조약’이 체결되었다.<ref name=mori/><ref name=toyama/> 그에 따르면, 청나라가 일본군의 출병을 보민의 의거로 인정하고 일본은 ‘''[[타이완 원주민|생번]]''’(대만 산악족)<ref>[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30119400?IS_STYLE=default&IS_LGC_S32=&IS_TAG_S32=&IS_KEY_S1=%E4%BA%92%E6%8F%9B%E6%9D%A1%E6%AC%BE&IS_TAG_S1=InfoD&IS_KIND=SimpleSummary& 대만정벌사건/65 70 태정대신 포고/七一互換条款] 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ref>에 대한 법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1874년]] [[12월 20일]]까지 정벌군을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또한 청일 양국 간 호환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조난당한 일본인에게 위로금 10만냥을 지불하고 40만냥<ref group="주해">일본이 이 출병에 소요된 전비는 이 10배에 달했다. 平尾『子爵谷干城傳』(1981)p.398</ref>을 대만의 제반 설비 비용으로 스스로 사용하도록 비용을 마련했다.<ref>[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30119500?IS_STYLE=default&IS_LGC_S32=&IS_TAG_S32=&IS_KEY_S1=%E5%8F%B0%E6%B9%BE%E3%80%80%E5%9B%9B%E5%8D%81%E4%B8%87%E4%B8%A1&IS_TAG_S1=InfoD&IS_KIND=SimpleSummary& 대만정벌사건/66 72 互換〓単] 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ref>또한 청나라가 일본군의 행동을 승인했기 때문에 류큐 국민은 일본인이라는 것, 즉 류큐의 일본 귀속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형태가 되었다.<ref name=mori/>
 
== 결과 ==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귀속이 명확하지 않은 류큐였지만, 이 사건의 처리를 통해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메이지 정부는 이듬해 [[1875년]], 류큐에 대해 청나라의 책봉, 조공 관계의 폐지와 메이지 연호 사용 등을 명령했다. 그러나 류큐는 청나라와의 관계 존속을 탄원하였고, 청나라가 류큐의 조공 금지에 항의하는 등 외교적인 결론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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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메이지 정부는 병력 수송을 영미의 선박 회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거부당했고 대형 선박을 급히 구입하여 국영 기업인 일본우편증기선회사에 운항을 위탁했지만, 이것도 거부당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부득이 신흥 민간 기업인 [[미쓰비시]]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협력을 통해 이후 미쓰비시는 정부에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일대 재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질병 ==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8명, 전상 25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장기 주둔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말라리아 등의 감염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출정한 군인, 군속 5,990여 명 중 환자 수는 16,409명, 즉 인당 약 2.7회에 걸쳐 질병에 걸리는 비참한 상황에 빠졌다.
 
[[1871년]], [[병부성]]은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되었고, 군의관학교는 육군성에 속했으며, 군의료 책임자는 마쓰모토 준이었다. 타이완 출병 당시 군의관부 창립부터 기간이 짧아 경험이 부족했지만 총력을 기울여 사태를 맞았다. 출정군의 의무 책임자는 쿠와타 고오헤 이등군의관정(소령 상당), 부대의 의료관은 미야모토 마사히로 군의(대위 상당)였다. 그 외에도 24명의 의무관이 종군을 하고 있었다. 의무관들은 모두 분투했지만, 극악의 환경과 맹렬한 전염병으로 와병하는 사람이 많았고, 사이고 도독으로부터 병사에게 약만 처방해달라고 요청을 받았다. 의관의 대부분은 [[한의사]]로 열대 질병 치료에 전혀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교대로 22명이 도착했기 때문에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궁내성에서 외국인 의사가 파견되었다. 독일 출신의 구스타프 센베르크(Dr. Gustav Schoenberg)는 [[도쿄대학]] 의학부의 전신에 해당하는 대학교에 속한 외국인 의사 레오폴트 뮐러를 천거했지만 능력이 없어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와 함께 보낸 6개의 제빙기는 매우 유용하다고 알려져 있다.
 
== 참고자료 ==
{{참고 자료 시작}}
* {{서적 인용
| last = Chiu
| first = Hungdah
81번째 줄:
| isbn = 0-03-048911-3
}}
* {{서적 인용 |last1=Davidson |first1=James W. |authorlink=James W. Davidson |제목=The Island of Formosa, Past and Present : history, people, resources, and commercial prospects : tea, camphor, sugar, gold, coal, sulphur, economical plants, and other productions |year=1903 |publisher=맥밀란|url=https://archive.org/details/islandofformosap00davi |location=런던과 뉴욕|ol=6931635M |oclc=1887893 |ref=harv}}
* {{서적 인용 |last=Kerr |first=George |authorlink=George H. Kerr |제목=Okinawa: The History of an Island People |edition=revised |location=Tokyo |publisher=Tuttle Publishing |year=2000 |others=Afterword by Mitsugu Sakihara |isbn=9780804820875 |orig-year=1958 |ref=harv}}
* {{서적 인용
| last = Paine
| first = S.C.M
94번째 줄:
| isbn = 0-521-81714-5
}}
* {{서적 인용
| last = Ravina
| first = Mark
105번째 줄:
| isbn = 0-471-08970-2
}}
* {{서적 인용 |last=Smits |first=Gregory |year=1999 |제목=Visions of Ryūkyū: Identity and Ideology in Early-Modern Thought and Politics |location=호놀룰루|publisher=하와이 대학교 출판부|isbn= }}
{{참고 자료 끝}}
 
== 각주 ==
{{각주}}
 
=== 주해 ===
{{각주|group="주해"}}
 
== 바깥 고리 ==
{{위키공용분류|Taiwan Expedition of 1874}}
{{참고 자료 시작}}
* {{서적 인용 |last=House |first=Edward H. |year=1875 |제목=The Japanese Expedition to Formosa |location=Tokio |oclc=602178265 |url=http://catalog.hathitrust.org/Record/001606567 |ol=6954039M |ref=harv}}
{{참고 자료 끝}}
 
128번째 줄:
[[분류:1874년 일본]]
[[분류:1874년 중국]]
[[분류:1874년 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