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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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의 지방 행정으로, 도쿠가와 가를 [[슨푸 번]]으로 이동, 교토, [[나가사키 현|나가사키]], [[하코다테]]를 정부 직할 '부(府)'로 한 것 이외는, 원칙으로서 이전의 번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국강병 목적의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화에 의한 정부의 지방 지배 강화가 필요했다.
 
우선, 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가 자발적으로 판(토지), 적(인민)을 천황에게 반납하여, 다시 지번사(知藩事,지한사지한지)로 임명되어, 번의 영지와 영주의 분리를 도모할 수 있어, 중요 지역이나 옛 막부부 직할지였던 부, 현과 함께 '부번현 체제(府藩県体制)'가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진행시켜, 개혁을 전국적으로 망라하려는 데에 있어 번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고, 번 측에서도 재정의 핍박이 계속 되어 자발적으로 폐번을 신청하는 번이 잇따랐다. 1871년 8월 29일, 사쓰마, 조슈 번 출신의 지도자에 의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제도 설치(당초에는 3부 302현, 직후 정리되어 3부 72현), 중앙정부로부터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것에 대해선, 령제국의 지명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명이 부현명이 된 곳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이외는 눈에 띈 반발은 없었다.<ref>반발이 없었던 이유는 벌써 중앙 군제가 갖추어져, 개별적으로 번이 대항하기 어려웠던 점, 번의 재정이 위기상황에 빠져도 지번사가 어찌할 수 없었던 점, 구 번주가 [[화족]]으로써의 신분, 재산이 보증된 점, 등이 이유로 여겨진다.</ref>
 
=== 여러 제도의 개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