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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 임씨'''(昭容 任氏, [[1598년]]<ref> 《연려실기술》권21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광해의 난정(亂政) 부분에 "경술년“경술년(1610년) 나이 열세 살에 그 외조모가 연줄을 타서 궁중에 바쳤다."고”라고 기록되어 있다.</ref> -~ [[1628년]]<ref> 《속잡록》무진년 상 숭정(崇禎) 원년(1628년) 기록에 "임소원“임소원(任昭媛)을 잡아 사형에 처했는데 그는 폐주가 거느리던 사람"이라고사람”이라고 되어 있다.</ref>)는 [[조선]]의 제15대 [[왕]] [[조선 광해군|광해군]]의 [[후궁]]이다. 본명은 애영(愛英)이다.<ref> 《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3일(을축) 6번째기사. </ref>
 
== 생애 ==
 
[[1598년]]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1610년]]에 궁중에 들어왔다. [[본관]]은 [[풍천 임씨|풍천]](豊川)이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600&mobile&categoryId=15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취정〉]</ref>. [[임몽정]](任夢正)의 딸이자 [[임취정]](任就正)의 조카로, 어머니는 임몽정의 첩이다.<ref name="non">《조선왕조실록》인조 3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9월 14일(신축) 1번째기사</ref>. 한편 [[임수정]](任守正)의 딸이라는 말도 있다.<ref>《조선왕조실록》광해군 70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9월 25일(경진) 4번째기사</ref>. [[조선]]의 제15대 [[왕]] [[조선 광해군|광해군]](光海君)의 [[후궁]]으로, 품계는 정3품 [[내명부|소용]](昭容)이었다. 언제 입궁했는지는소용(昭容)이 되었는지는 그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613년]](광해군 5년) [[음력 12월 30일]]의 《[[광해군일기]]》 기사에 그녀를 "소용“소용 임씨"로임씨”로 지칭한 기록이 등장한다.<ref name="ghg"> 《조선왕조실록》광해 73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12월 30일(계축) 2번째기사</ref>.
 
임씨는 용모가 매우 뛰어나고 아첨을 잘 하여, 계략이 뛰어난 [[김개시]](金介屎) 및 문서 처리 능력이 훌륭했던 [[소용 정씨 (광해군)|소용 정씨]](昭容 鄭氏) 등과 함께 광해군의 총애가 "후궁에서“후궁에서 으뜸"이었다고으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name="ghg"/>.
 
한편 임씨는 [[인조 반정]]이 일어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이 폐위되자, [[조선 인조|인조]](仁祖)의 명에 따라 광해군의 유배지에서 함께 있으면서 그 시중을 들었다.<ref>《조선왕조실록》광해 187권, 15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13일(계묘) 8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25일(을묘) 1번째기사</ref>. 이후 그녀에 대해 폐주의 후궁이라 하여 사사가 논의되었으나, 광해군 재위 시절 [[이귀]](李貴)와 [[김자점]](金自點)이 고변을 당할 때 두 사람을 옹호한 공이 있어 죽음을 면하고 계속 해서 광해군의 곁에서 그 시중을 들 수 있었다.<ref name="non"/>.
 
[[1628년]]에 유배지에서 광해군을 모시다가 잡혀 와 사형에 처해졌다. 남편 [[조선 광해군|광해군]]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분류:생몰년1598년 미상태어남]]
[[분류:1628년 죽음]]
[[분류:조선의 후궁]]
[[분류:풍천 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