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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전반기 ===
 
등애는 부모를 일찍 잃고 여남(汝南)에서 송아지를 길렀다. 지형을 살피고 그림을 그리면서 군사작전에 적합한지를 연구하기를 좋아했으나 말더듬이여서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이후 상계리(上計吏)를 지낼 때 [[사마의]](司馬懿)를 만나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이후 수춘(壽春)을 시찰하던 등애는 운하를 통해 물을 끌어들일 구상을 하고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사마의]]에게 바쳤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운하가 완성된 후 수해가 줄고 군사들과 식량을 보내기가 편리해졌다.
 
[[조모]](曹髦)가 등극한 후 방성정후(方城亭侯)에 봉해졌다. [[251년]]에는 조정에 글을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255년]] [[관구검]](毌丘倹)이 [[문흠]](文欽)과 함께 반 사마씨 봉기를 일으키자, 당시 연주자사였던 등애는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낙가성(樂嘉城)을 점거하여 [[문흠]]을 유인했다. [[문흠]]은 자신의 군사가 더 많다고 여기고 낙가성으로 쳐들어왔으나 이미 [[사마사]](司馬師)의 대군이 당도해 있었기에 끝내 패주했다. 등애는 [[문흠]]을 끝까지 추격하여 [[오 (삼국)|오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반 사마씨 봉기가 진압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안서장군(安西將軍)을 대행하고 방성향후(方城鄕侯)가 되었다.
[[263년]]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이었던 등애는 [[사마소]](司馬昭)가 촉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정벌이 확정된 후 결국 참전하게 되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흔 등을 거느리고 정면에서 [[강유]]를 공격하고, [[제갈서]](諸葛緖)는 강유의 퇴로를 끊었다. 등애는 강유를 격파했으나 제갈서가 [[강유]]의 계책에 속아 [[강유]]가 검각(劍閣)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편 주력 10만을 이끌고 있는 [[종회]]가 검각에서 강유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자, 등애는 촉나라의 후방을 위협하여 강유 군을 물리고, 종회의 진군 통로를 열어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갈서와 함께 음평(陰平) 길을 통해 성도를 직접 위협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갈서가 응하지 않고 종회에게로 가, 등애는 홀로 음평 길로 나아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준한 지역 7백여 리를 거쳐 강유(江由)에 도착했다. 강유를 지키던 촉나라의 장수 [[마막]](馬邈)은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이 나타나자 즉각 항복하였다. [[제갈첨]](諸葛瞻)이 면죽관(綿竹關)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등애는 장수들을 독려하여 면죽관을 점령하고 [[제갈첨]] 부자와 [[장준 (촉한)|장준]](張遵) 등을 죽였다.
 
등애가 [[청두|성도]]로 진군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유선 (공사)|유선]](劉禪)은 [[초주]](譙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몸을 묶고 등애의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했다. 이로써 촉나라는 멸망했으며, 조정에서는 등애를 태위(太尉)로 삼고 식읍 2만 호를 내렸다. 등애는 장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하는 것이 없게 하고, 항복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구업을 회복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아울러 [[사마소]]에게 글을 올려 [[유선 (공사)|유선]]을 우대하고 오나라를 정벌할 방안을 건의했다. [[사마소]]가 선뜻 받아들이지 않자 재차 글을 올려 오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등애는 자신의 전공을 뽐내고, 촉한의 사대부들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자못 자랑하였으며 자신을 [[강유]]의 위에 두었으므로, 식견있는 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 죽음 ===
 
[[종회]]는 부하장수 [[위관 (서진)|위관]](衛瓘), [[호열]](胡烈) 등과 함께 등애를 모함하고 등애의 글을 가로채 불손한 내용으로 바꿔 보냈다. 결국 등애를 의심하게 된 [[사마소]]는 [[264년]] 1월 등애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종회]]는 [[위관 (서진)|위관]]을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게 했다. 등애는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아들 [[등충]](鄧忠)과 함께 [[위관 (서진)|위관]]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함거에 갇혔다.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 죽자 등애의 부하들은 함거를 부수고 등애를 구출했다. [[위관 (서진)|위관]]은 정촉의 공을 독차지하려 했고 자신이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한 것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호군 [[전속]](田續)을 보내 등애 부자를 죽였다.
 
원래 [[전속]]은 강유(江由)에 왔을 때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에 등애가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 [[위관 (서진)|위관]]은 [[전속]]에게 옛 일을 설욕할 수 있다고 부추겨 끝내 등애를 죽게 한 것이다.
 
[[273년]] 의랑(議郞) 단작(段灼)과 옛 촉나라의 신하였던 [[번건]](樊建)이 [[서진|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에게 등애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등애의 맏손자 등랑(鄧郞)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분류:264년 죽음]]
[[분류:삼국지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
[[분류:사형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