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 (촉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clean up, replaced: 삼국지 촉나라 → 중국 삼국 시대 촉나라 using AWB
21번째 줄:
“마초는 [[한신]](韓信), [[영포]](英布)의 용맹을 갖추고 강(羌), 호(胡)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隴上)의 여러 군(郡)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마초는 서융의 강족과 융족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거병하여, 마침 하간<ref>(기주의 속군</ref>)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조조가 서둘러 철수한 빈 틈을 노리고 농상을 공격했다. 농상 지방의 군과 현들은 기를 제외하고 모두 마초에게 호응했으며, 또 한중의 [[장로 (후한)|장로]]도 마초에게 원군을 보내 주었다. 마초는 양주자사 [[위강 (후한)|위강]] 등 자사 · 태수들이 항전하는 기성을 정월부터 8월까지 공격하였으며, 구원군이 오지 않아 희망을 잃은 기성의 관리들은 결국 마초와 화의를 맺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이러던 중 5월에 조정에 있던 아버지 [[마등]] 등의 일족은 마초의 죄에 연좌되어 삼족이 모두 멸한다. 마초는 입성한 뒤 화의를 깨고 [[양앙]]을 시켜 위강 등 자사와 태수들을 살해하고 기성을 거점으로 그 군세를 부하로 흡수했다. 마초는 스스로 정서장군이라 칭하고 병주목을 겸무해 양주의 군사도독이 되었다. 9월, 원래 위강의 부하 [[양부]]와 강서가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초가 출진하지만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 틈에 양관과 조구 등이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고 기성의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으므로 마초는 진퇴양난에 빠져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도주하여, [[장로 (후한)|장로]](張魯)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장로에게 군대를 받아 [[윤봉 (후한)|윤봉]], [[조앙 (후한)|조앙]]이 지키고 있는 기산을 공격했으나, [[하후연]]이 보낸 [[장합]]의 원군을 보자 달아났다.
 
마초는 [[장로 (후한)|장로]]를 따른 후부터 종종 북쪽으로 진군해 양주 탈환을 노리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장로 (후한)|장로]]는 마초가 바라는 대로 군사를 내주었지만, [[장로 (후한)|장로]]의 장군 양백 등이 마초의 능력을 비난하자 설자리를 잃은 마초는 무도에서 [[저족]]이 사는 곳으로 달아났다. 이때 마초는 투병중이라서 후방의 진지에 남아있는 [[방덕]]을 버리고 [[마대 (촉한)|마대]](馬岱) 혼자만 데리고 가버렸고, 이 일로 인해 [[방덕]]은 위에 투항하여 [[관우]]와 대적하게 된다.
42번째 줄:
[[진수]]의 평: 마초는 융족과 용력에 의지해 자신의 일족을 망쳤으니 애석하구나! 곤궁함에 처하여 이로 인해 태평함으로 나아갔다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양부]]의 평: 조공(조조)에게말하길에게 말하길 마초는 [[한신]](韓信), [[영포]](英布)의 용맹을 갖추고 강(羌), 호(胡)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隴上)의 여러 군(郡)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출처]]-마초전-
 
[[제갈량]]의 평:“맹기(孟起-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雄烈-굳세고 맹렬함)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경포(黥布), 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입니다. 응당 익덕(益德-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있는 자라 평하였다
73번째 줄:
[[분류:조조 휘하의 장군]]
[[분류:유비 휘하의 장군]]
[[분류:삼국지중국 삼국 시대 촉나라의 장군]]
[[분류:마등과 주변 인물]]
[[분류:장로와 주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