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34번째 줄:
[[기원전 59년]] 옥타비아누스의 나이 네 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났다.<ref name="chisholm 23"> Chisholm, 23. </ref> 얼마 안 돼 어머니 아티아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ref name="카이사르"> {{서적 인용|저자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제목 =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출판사=풀빛미디어|연도=1998|쪽=1권 97|언어=한국어 }} </ref><ref> [[Nicolaus of Damascus]], ''[http://www.csun.edu/~hcfll004/nicolaus.html Augustus]'' 3. </ref>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6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필리푸스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소(小) 옥타비아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ref name="카이사르"/><ref> [[Quintilian]], [http://www.thelatinlibrary.com/quintilian/quintilian.institutio12.shtml#6 12.6.1]. </ref>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뒤인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었고<ref name="카이사르"/>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선출되었다.<ref> Nicolaus of Damascus, [http://www.csun.edu/~hcfll004/nicolaus.html ''Augustus''] 4. </ref><ref name="rowell 16"> Rowell, 16. </ref> 다음 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세운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서 행해지는 [[그리스 경기]]를 관장하였다.<ref name="rowell 16"/>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ref> Nicolaus of Damascus, ''[http://www.csun.edu/~hcfll004/nicolaus.html Augustus]'' 6. </ref>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타고 카이사르의 뒤를 쫓았으나 배는 곧 난파되었다. 육상으로부터 숙련된 정비사들이 와서 난파된 배를 수리한 후 원래 자신이 머물던 적의 영토에서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였는데, 이 사건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ref name="카이사르"/>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자기 마차에 동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였다.<ref> Velleius Paterculus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Velleius_Paterculus/2C*.html#59.3 2.59.3]. </ref> 로마로 돌아오고 난 뒤 카이사르는 새 유언장을 사제녀들과 함께 보관하였고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 상속자로 낙점하였다.<ref> {{서적 인용|저자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제목 =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출판사=풀빛미디어|연도=1998|쪽=1권 82|언어=한국어 }} </ref>
61번째 줄: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ref name="eck 15"/> 이 5년간의 명백한 월권 행위는 비공식적이었던 [[폼페이우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와 달리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았다.<ref name=autogenerated3> Scullard, 163. </ref><ref name="eck 15"> Eck, 15. </ref>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ref name="eck 16"> Eck, 16. </ref>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ref> Scullard, 164. </ref> 3명의 집정관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ref name="eck 16" /> 세 집정관의 이러한 수단은 암살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숙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ref name="eck 16"/>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ref name="eck 16"/>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ref name="eck 17"> Eck, 17. </ref>
 
[[기원전 42년]] [[1월 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라 부르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ref> Syme, 202. </ref>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의 군단을 해로로 보내어 [[그리스]]에 세력을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다.<ref name="eck 17"/>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 (로마)|마케도니아]]의 [[필리피 전투|필리피]]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로마군을 승리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뒷날 이 전투들의 성과를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 보이게 하려 하였는데 두 번의 필리피 전투 모두 안토니우스군이 로마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ref name="eck 17 18"> Eck, 17–18. </ref> 추가로, 두 번의 승리의 전과를 따지는데, 안토니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직속 지휘권을 넘겨준 옥타비아누스를 겁쟁이라고 낙인을 찍었다.<ref name="eck 17 18"/>
 
필리피 전투 이후,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토 협정이 맺어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의 [[이집트]]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상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정부이자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속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히스파니아로 가게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방해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히스파니아로 가게 하였다.<ref name="eck 18"> Eck, 18. </ref>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곧 제대할 많은 병사를 정착시키기 위해 일단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이 많은 병사는 과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화파 쪽에서 서서 싸운 병사들로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으면 쉽게 그의 정적들과 연합할 수 있었으나 그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ref name="eck 18"/> 더 이상 병사들의 정착지를 위해 분배해줄 국유지가 없자 옥타비아누스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로마 시민의 땅을 몰수하여 시민들을 멀리하는 것 또는 로마의 심장부에서 그에게 대적할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수 있는 많은 로마 병사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전자를 택하였다.<ref name="eck 18 19"> Eck, 18–19. </ref> 새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18개의 도시가 그 땅으로 사용되었는데 도시에 살고 있던 모든 시민들이나 일부 시민들을 쫓아내 버렸다.<ref name="eck 19"> Eck, 19. </ref>
97번째 줄:
[[파일:Caesar augustus.jpg|오른쪽|섬네일|200px|아우구스투스의 동상. 머리 부분은 기원전 30년~기원전 20년경에 제작되었고, 몸통은 2세기에 제작되었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princeps civ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흔히 '[[프린켑스]]'라고만 쓰는 이 칭호는 공화정 시대에 지도급 원로원 의원으로 인정받은 집정관 역임자이자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자를 뜻했다.<ref>{{서적 인용 |성 = M.하이켈하임|이름 = 프리츠|제목 = 로마사(A History of the roman people)|출판사 = 현대지성사|출판위치 = 서울|id = ISBN 89-8347-011-9|쪽 = 541|날짜 = 1999년 3월 10일|저자2 = 세트릭 A. 요|저자3 = 앨런 M. 워드}}</ref>이 칭호는 실제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폼페이우스]]에게도 수여된 전례가 있었다.<ref>{{서적 인용|제목 = 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저자 =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쪽 = 33|출판사 = 한길사|연도 = 1997}} </ref>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는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현실 속에서 로마의 최고 책임자라는 것을 반영한다.<ref name="eck 149"> Eck, 149 </ref><ref name="eck 3" />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위임받았던 여러 특권을 [[원로원]]에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속주와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보호자,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ref name="eck 45"> Eck, 45. </ref>
 
대중은 엄청난 양의 부를 아우구스투스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공건물 건설과 가도 유지·보수에 자발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기대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가도 건설에 나섰다.<ref name="eck 80"> Eck, 80. </ref> [[기원전 16년]]에 발행된 화폐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막대한 양의 돈을 공공기금에 기부한 후 이루어낸 가도 건설을 선전하였다.<ref name="eck 80"/>
 
하지만 역사학자인 [[하워드 스컬러드]](Howard Scullard)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 결제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ref name = "Scullard_p211"> Scullard, 211. “…a predominant military power and that the ultimate sanction of his authority was force, however much the fact was disguised.” </ref> 원로원은 내전을 종결시킨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의 통치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 요청은 아우구스투스가 초법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원로원이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면서 계속해서 공직을 수행하였으며 10년 기한의 속주 통치 권한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였다.<ref name="eck 46"> Eck, 46. </ref><ref> Scullard, 210. </ref>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게 된 속주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속주|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아이깁투스|이집트]] 등 로마에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속주들이었다.<ref name="eck 46"/><ref name="ccaa 34"> CCAA, Erich S. Gruen, ''Augustus and the Making of the Principate'', 34. </ref>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일 때, 자신이 통치하는 속주에 파견할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는다.<ref name="eck 47"> Eck, 47. </ref> 반면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지 않는 “원로원령 속주”<ref>하이켈하임의 《로마사》에서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의 조정 조치로 원로원이 맡게 된 속주를 "'원로원령' 속주"로, 황제가 자신의 레가투스와 대리인이 다스리는 지역을 "'황제령' 속주"로 쓰고 있다. 여기서는 이 표기를 따른다. p.544 </ref>의 경우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다.<ref name="eck 47"/> 속주와 군단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다.<ref name="ccaa 24"> CCAA, Walter Eder, Augustus and the Power of Tradition, 24. </ref> 고대 로마의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던 [[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로원에서 파견한 총독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며, [[시칠리아 속주]] 및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등 여러 속주는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였다.<ref name="ccaa 24"/>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수의 속주만 원로원에서 임명한 전직 집정관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으며, 나머지 지역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감히 대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ref name="ccaa 24 25"> CCAA, 24–25. </ref><ref name = "Scullard_p211"/> 광활하고 지리적으로 먼 '황제령' 속주에는 대다수 군단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법무관급 레가투스를 임명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 로마사(A History of the roman people)|출판사 = 현대지성사|출판위치 = 서울|id = ISBN 89-8347-011-9|쪽 = 544|날짜 = 1999년 3월 10일|성1 = M.하이켈하임|이름1 = 프리츠|저자2 = 세트릭 A. 요|저자3 = 앨런 M. 워드}}</ref>
 
[[파일:Augustus Bevilacqua Glyptothek Munich 317.jpg|섬네일|왼쪽|[[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142번째 줄: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ref name=autogenerated2 />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ref name="ccaa 50"> CCAA, Erich S. Gruen, ''Augustus and the Making of the Principate'', 50. </ref>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ref name="ccaa 50"/>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율리우스-아우구스투스 황조)|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대 율리아|율리아]]를 결혼시켰다.<ref name="수에토니우스 153"> {{서적 인용|저자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제목 =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출판사=풀빛미디어|연도=1998|쪽=1권 153|언어=한국어 }} </ref>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ref name="수에토니우스 153"/>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ref name="수에토니우스 153"/>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ref name="수에토니우스 153"/>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ref> {{서적 인용|저자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제목 =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출판사=풀빛미디어|연도=1998|쪽=1권 227|언어=한국어 }} </ref>
 
[[파일:Augustuksen mauseleomi.JPG|섬네일|200px|아우구스투스 영묘]]
162번째 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계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Pax Augusta'')라 칭송받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째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리비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많은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도인 로마 시에 “경찰청”(''Praefectus urbi'')과 “소방청”(''Praefectula vigilum'')을 만들었으며, 지방 자치 단체들에 상주하는 장관들을 파견하였다.<ref name="eck 79"> Eck, 79. </ref> 경찰청은 대대별로 500명씩이었으며, 소방청은 대대별로 500에서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7개 대대가 14개 구의 치안과 화재 진압을 담당하였다.<ref name="bunson 345"> Bunson, 345. </ref>
 
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28개 [[로마 군단|군단]],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ref name="eck 85 86"> Eck, 85–87. </ref> 이들은 각 속주의 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과 함께 국방을 담당하였다.<ref name="eck 86"> Eck, 86. </ref> 또한 역참 제도를 창설하여 “관찰장관”(''praefectus vehiculorum'')이라 불리는 장교들이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자비를 털어서 도로를 유지 및 보수하였다.<ref name="eck 81"> Eck, 81. </ref> 동시에 추가로 가도를 더 건설하여, 더욱 더 빠른 통신 체계를 갖추면서 군대가 신속하게 행군할 수 있게 되었다.<ref name="chisholm 122"> Chisholm, 122. </ref> [[6년|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는 현역 및 퇴역 군인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하여 “군인 연금 기금”(''aerarium miltare'')을 만들었다.<ref name="bunson 6"> Bunson, 6. </ref>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근위대”를 창설하였다.<ref name="bunson 341"> Bunson, 341. </ref> 근위대는 훗날 원로원에 압력 넣기, 새 황제 추대, 기존의 황제 제거 등 로마의 역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근위대는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할 때까지 존속한다.<ref name="bunson 341 342"> Bunson, 341–342. </ref>
230번째 줄:
* Eck, Werner; translated by Deborah Lucas Schneider; new material by Sarolta A. Takács. (2003) ''The Age of Augustus''. Oxford: Blackwell Publishing (hardcover, ISBN 0-631-22957-4; paperback, ISBN 0-631-22958-2).
* Eder, Walter. (2005). "Augustus and the Power of Tradi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Age of Augustus (Cambridge Companions to the Ancient World)'', ed. Karl Galinsky, 13-32. Cambridge, MA;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hardcover, ISBN 0-521-80796-4; paperback, ISBN 0-521-00393-8).
* Everitt, Anthony (2006) ''Augustus: The Life of Rome's First Emperor''. Random House Books. ISBN-10: 1400061288.
* {{서적 인용|성=Green |이름=Peter |제목=Alexander to Actium: The Historical Evolution of the Hellenistic Age |series=Hellenistic Culture and Society |연도=1990 |출판사=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위치=Berkeley, CA; Los Angeles; London |id=ISBN 0-520-05611-6 (hbk.); ISBN 0-520-08349-0 (pbk.) }}
* Gruen, Erich S. (2005). "Augustus and the Making of the Principate,"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Age of Augustus (Cambridge Companions to the Ancient World)'', ed. Karl Galinsky, 33-51. Cambridge, MA;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hardcover, ISBN 0-521-80796-4; paperback, ISBN 0-521-00393-8).
247번째 줄:
== 바깥 고리 ==
{{포털|역사}}
{{commons위키공용|Augustus }}
* [http://navercast.naver.com/peoplehistory/foreign/1509 네이버캐스트 - 아우구스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