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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받아 러더퍼드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보어는 1913년 원자 구조 모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에서 원자 핵 주위의 궤도를 움직이는 전자 이론을 소개하였고, 또한 외부 궤도에 존재하는 전자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화학적 특성까지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높은 에너지 궤도에서 낮은 에너지 궤도로 전자가 전이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때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광자]]가 방출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양자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 이론의 발표는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Albert Einstein) 이 이론을 지지하였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적 개념을 섞은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이론의 성과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이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수도승의 격언을 따라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뿐만 아니라 다른 물리학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윌리암 슈테른]](William Stern) 과 [[막스 폰 라우에|라우에]](Max Theodor Felix von Laue) 는 만약에 보어의 이론이 옳다면 본인이 물리학을 그만 두겠다 고도 했다.
그 후 보어와 그의 동료들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몇 개의 이론을 검증하였으나, 실질적인 발전은 1925년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가 발표한 [[파울리 배타 원리|배타원리]]가 나온 이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닐스 보어는 슬하에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두 명은 일찍 죽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자식들은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잘 교육시켰다. 그 중 [[아게 닐스 보어]]는 그의 아버지처럼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었는데 그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1975년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 초기삶 ===
보어는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찬 보어(Christian Bohr)는 헌신적인 [[루터파]]의 종교인이었는데 [[코펜하겐 대학]]의 생리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어머니 엘렌 아들러 보어(Ellen Adler Bohr)는 은행업을 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의회의 구성원인 부유한 [[유태인]] 가족출신이었다. 그의 형 헤럴드 보어(Harald Bohr)는 수학자이자 덴마크 국가대표팀의 [[풋볼]] 선수였다. 닐스 보어는 풋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였다.
 
그는 크리스챤 크리스챤센(Christian Christiansen)밑에서 학부생활을 보냈으며, 코펜하겐 대학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였으며 그 곳에서 1911년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는 [[금속]]내의 [[전자]]이론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확대해서 1911년에 박사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보어는 이 당시에 금속 내 전자 이론을 확립함에 있어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맥스웰]]과 [[헨드릭 안톤 로런츠|로렌츠]]에 의해 대표되는 고전[[전자기학]]으로는 설명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보어는 박사 학위 취득 후 그는 [[캠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조지프 존 톰슨]](J. J .Thomson) 밑에서 실험을 하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톰슨은 전자의 발견자이다.) 그렇지만 보어는 영어에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톰슨이 그런 보어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톰슨과 같이 공부하고 싶어 하던 소망을 버려야 했다. 그 후, 그는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밑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영국에 있는 [[맨체스터 대학]](Manchester University)으로 갔다. 보어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그 당시에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자 모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때 그 정보는 그 당시의 물리법칙과는 연결될 수 없는 배타적인 것이었다. 보어는 이 원자구조를 연구하면서 빛의 양자적인 성질이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것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1913년 다시 코펜하겐으로 돌아왔을 때, 한 친구는 [[수소]]의 [[스펙트럼]] 계열에 관한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의 공식이 보어가 연구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여기에
도움을 받아 러더퍼드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보어는 1913년 원자 구조 모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에서 원자 핵 주위의 궤도를 움직이는 전자 이론을 소개하였고, 또한 외부 궤도에 존재하는 전자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화학적 특성까지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높은 에너지 궤도에서 낮은 에너지 궤도로 전자가 전이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때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광자]]가 방출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양자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 이론의 발표는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Albert Einstein) 이 이론을 지지하였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적 개념을 섞은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이론의 성과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이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수도승의 격언을 따라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뿐만 아니라 다른 물리학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윌리암 슈테른]](William Stern) 과 [[막스 폰 라우에|라우에]](Max Theodor Felix von Laue) 는 만약에 보어의 이론이 옳다면 본인이 물리학을 그만 두겠다 고도 했다.
그 후 보어와 그의 동료들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몇 개의 이론을 검증하였으나, 실질적인 발전은 1925년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가 발표한 [[파울리 배타 원리|배타원리]]가 나온 이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닐스 보어는 슬하에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두 명은 일찍 죽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자식들은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잘 교육시켰다. 그 중 [[아게 닐스 보어]]는 그의 아버지처럼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었는데 그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1975년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 물리학 ===
1926년에 보어는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덴마크 정부와 [[칼스버그]](Carlsberg) 재단의 도움으로 그는 1921년 코펜하겐에 닐스 보어 연구소를 만들고, 그곳의 대표가 되었다. 1922년에 보어는 원자 구조와 원자에서 나오는 [[복사에너지]]의 발견으로 인하여 노벨상을 받게 된다. 보어 연구소는 1920~30년대까지 이론물리학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후원해 주었고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들이 그 기간 동안 그곳에서 연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