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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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도의 기원 ==
{{인용문3|right|우리나라에는 현모한현묘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 도(道)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敎化)하였다.|[[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삼국사기]]》에 인용}}
[[화랑도|화랑]]의 제도적 설치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576년]]([[진흥왕]] 37)의 기록으로서, 이 해에 [[진흥왕]]은 처음으로 [[원화 (역사)|원화]](源花)를 받들게 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자를 뽑아 3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다 한다. 이들 두 여자는 질투 끝에 [[준정]]이 [[남모]]를 살해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서 [[화랑도|화랑]] [[사다함]](斯多含)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어 [[화랑도]]의 기원을 훨씬 앞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따라서 [[화랑도]]의 기원은 학자에 따라 [[두레]], 혹은 《조의선인》(皁衣仙人) 등을 내세우고 있어 아직 정설이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화랑도]]가 우리 고대 사회에 있어 독특한 형태로 발생한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