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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 회의'''(Diet of Worms) 또는 '''보름스 제국회의'''는 1521년 3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해 루터의 견해를 심의한 사건을 말한다.
 
== 배경 ==
라이프치히 논쟁 이 후 루터는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루터의 개혁 사상과 민족주의를 지지하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였다. 비텐베르크 근교에 살던 주민들은 길에서 여행자를 만나면 "당신은 마르틴 편입니까?"라고 물으려 만일 그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구타까지 할 정도였다. 루터의 영향력이 확산되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의 사절 알레안더(Alender)는 카알 5세에게 사람을 보내 종교개혁을 탄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카알 5세는 직접 루터의 견해를 직접 들어보고자 루터를 제국회의에 소환하였다.
 
== 루터의 참석 ==
[[카를 5세]]는 루터의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였지만 이미 [[얀 후스]]나 [[윌리엄 틴데일]] 등 종교 개혁자들이 붙잡힌 즉시 체포되어 고문 당하고 화형을 당한 전례가 있어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에게 불참을 권유했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비서 스팔라틴(Spalatin)을 보내어 1415년 콘스탄스 회의에서 순교한 얀 후스의 예를 상기시키면서 루터에게 가지 말것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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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 회의 결과 ==
루터가 보름스 의회를 떠날 때, 약속대로 독일군이 그를 호위하여 체포되는 것을 막았다.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많은 백성들이 찬양하였지만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살해 음모를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4월 24일 병사들을 보내 루터를 은밀하게 아이제나흐 근처의 발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카를 5세는 루터의 단호한 입장에 충격을 받았다. 가톨릭 교도였던 황제는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5월 26일 '보름스 칙서'를 발표하면서 루터를 정죄하고, 루터의 모든 책을 불사르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체제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아니었으므로 루터를 체포 할 수는 없었다.<ref>오덕교《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P88~90)</ref>
 
 
== 평가 ==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에 죽음을 무릎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국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지옥 그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루터의 행위는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ref>토머스 칼라일《영웅숭배론》(한길사,P221~22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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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종교 개혁]]
[[분류:1521년 신성 로마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