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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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
{{참고|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같은해 [[10월 19일]] [[민주당 (대한민국, 1991)|통합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이 발생하여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1995년 [[12월 12일]]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가능하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ref>95헌마221</ref> 이에 정부는 고심 끝에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1995년 11월 말 전격적으로 구속 수감하였다. 1995년 [[12월 21일]] 국회는 5.18 민주화운동의 명예 회복을 위해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다.<ref>[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17 김영삼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127004 <`10년째 미완' 노태우 비자금 사건> ]</ref>
[[파일:Kim Young Sam 1996.png|200px|thumb|대통령 재임 시절의 김영삼(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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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에 검찰의 5.18 사건 불기소 처분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1995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1,1,list1,16.html 노태우 씨 구속 집행 표정] 1995.11.16 mbc뉴스데스크</ref> 12월 3일에는 전두환이 구속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2,1,list1,3.html 전두환 구속 수감 첫날] 1995.12.3 mbc 뉴스데스크</ref> 12월 19일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2,1,list1,19.html 여야 3당,5.18 특별법 합의] 1995.12.19 mbc뉴스데스크</ref> 이와 함께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밝혀지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전두환과 노태우등 관련자 8명을 구속 기소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1,1,list1,23.html] 1996.1.23 mbc뉴스데스크</ref> 김영삼은 군정과의 관계를 끊고자 1996년 2월,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첫 전당대회를 열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2,1,list1,6.html] 1996.2.6 mbc뉴스데스크</ref>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6년 8월, 각각 사형(전두환)과 징역 22년형(노태우)을 선고받았으나<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8,1,list1,26.html] 1996.8.26 mbc뉴스데스크</ref> 96년 12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전두환)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2,1,list1,16.html] 1996.12.13 mbc뉴스데스크</ref> 그 이듬해인 1997년 12월 20일, 대통령 김영삼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하여 석방함으로써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2년여 만에 출옥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70066&categoryId=200000317</ref><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20.html] 1997.12.20 mbc뉴스데스크</ref> 사면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당시 김영삼의 청와대는 김대중 당선자(12월 18일 대통령당선)에게 방문하여 제안하여 협의로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시켰다고 전해졌다.<ref>[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221_6187.html 국민 대화합 첫 단추] 1997.12.20 mbc뉴스데스크</ref>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터진 [[한총련]] 사태로 1200여명의 전경,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10053_6172.html 범청학련 시위로 경찰과 학생 모두 1200여명 부상] 1996.8.16 mbc뉴스데스크</ref> 1996년 12월 26일,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통과로 노동계와 정계에 엄청난 반발을 샀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2,1,list1,26.html] 1996.12.26 mbc뉴스데스크</ref> 이듬해 1월, 노동법파동으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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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의 방북시, 김일성은 지미 카터에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갑작스러운 북미관계 개선으로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315_6142.html 정부,국면 전환 주시] 1994.6.17 mbc뉴스데스크</ref> 6월 18일, 북측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자 무조건 수락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388_6142.html 김영삼대통령,남북정상회담 제의 사실 전달받아 즉각 수락] 1994.6.18 mbc뉴스데스크</ref> 불과 하루만에 북측의 놀라운 태도변화로 정부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국제적인 해빙무드를 거스를 수 없어 북측의 정상회담제의를 무조건 수락했다. 김영삼은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7월 2일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의 절차도 완전히 마무리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07,1,list1,2.html] 1994.7.2 mbc뉴스데스크</ref> 이제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대한민국]]의 통일은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그러나 7월 9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07,1,list1,9.html] 1994.7.9 mbc뉴스데스크</ref>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측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다.<ref name="오마이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14823 딱 네 글자에 3조원 쓴 YS... MB는?] - 오마이뉴스</ref>
 
김일성 사망 이후 남북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조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정상회담까지 약속했던 남북 관계는 불신만 커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기 시작했다.<ref name="오마이1"/>
이 당시 정부는 대외적인 여론을 주시하며 국내의 김일성 참배여론을 원천봉쇄했으나 [[전남대학교]]에서는 김일성분향소를 만들어 250여명의 학생들이 조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3566_6142.html 전남대 학생회관, 김일성 분향소 발견] 1994.7.15 mbc뉴스데스크</ref> 구 군사정권 관계자들이 [[김일성]] 빈소 조문 사건을 문제삼아 재기의 조짐이 보이자, 김영삼 정부는 일부 주동 대학생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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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교육부는 [[초등학교|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게 하였다. 1996년부터 모든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개명하게 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81200329101005&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08-12&officeId=00032&pageNo=1&printNo=15508&publishType=00010 국민학교 명칭 바뀐다] 1995.8.12 경향신문</ref> 이 당시에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쇠말뚝 뽑기운동이 일어났으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21600209101004&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2-1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771&publishType=00010 일제 쇠말뚝 제거 정부 지원] 1995.2.16 동아일보</ref> 구 [[조선총독부]] 철거 작업을 실시, 같은해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에 들어갔으며<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58083_6157.html 광복 50주년 중앙 경축식,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1995.8.15 mbc뉴스데스크</ref> 총독부는 1996년 11월에 완전 철거되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2270020911201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2-27&officeId=00020&pageNo=12&printNo=23408&publishType=00010&doNotReadAnyMore=notClose 구 총독부 건물 완전철거] 1996.12.27 동아일보</ref>
 
* [[1993년]]지존파 일당 7명이 5명을 연쇄 살인한 사건([[지존파 사건]]), 이들 중 6명의 사형이 1995년에 집행되었다. 전남 목포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참사]], 전북 부안군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1993년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고|구포역 열차 전복]],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사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확산 금지 조약 탈퇴를 선언
* [[1994년]]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사고|성수대교 붕괴참사]],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대구 상인동 지하철1호선 가스폭발참사]],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삼풍백화점 붕괴참사]], [[시프린스 호 사고]]가 일어났다. [[1995년]] 지방선거 직후인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06,1,list1,30.html] 1995.6.30 mbc뉴스데스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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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25일 취임 직후 총리에 황인성을 임명하는 등 2원 14부 6처의 장관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박희태 법무부 장관, 박양실 보사부 장관 등의 대학특례입학, 부동산투기 의혹 등이 제기되었고, 40대의 나이에 임명된 서울시장 [[김상철]]의 개발제한구역 내 자택 불법건축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법무, 보사부 등의 3개 부처 장관 및 서울시장이 경질되었다.
 
=== 보각 ===
1993년 10월 서해훼리호 참사의 책임을 물어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이 교체되었다.
 
=== 제1차 개각 ===
 
1993년 12월 8일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쌀시장 개방]]을 하지 않는다는 공약이 지켜지지 아니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취임 후 2번째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황인성 국무총리가 경질되고 [[이회창]] 감사원장이 후임 총리로 전격 발탁되었으며, 또한 쌀시장 개방 합의의 책임을 물어 [[이경식]] 경제부총리, [[한완상]] 통일부총리 등 14부처의 장관이 경질되었다.
 
=== 총리 인선 ===
 
1994년 4월 통일정책조정회의의 관할 문제로 [[이회창]] [[국무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격 사표를 제출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수리하였다. 후임에 이영덕 [[통일부총리]]가 내정됨에 따라 후임 통일부총리에 [[이홍구]]가 내정되었다.
 
=== 제2차 개각 ===
 
1994년 12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고,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통합하는 등의 건국이래 최대 규모의 정부조직 개편이 단행된 후 개각이 단행되었다.
국무총리에 [[이홍구]]가 내정되었고, [[경제부총리]]에 홍재형 [[재무부 장관]]이 내정되는 등 18부 장관이 교체되었다.
 
=== 보각 ===
1995년 3월 지방자치제 연기 공작을 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덕]] [[통일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나웅배가 내정되었다.
 
=== 제3차 개각 ===
 
1995년 12월 임기 4년차를 앞두고 국정 일신 차원에서 김대통령은 개각을 단행하였다. 국무총리에 [[이수성]] 서울대학교 총장이, 경제부총리에 [[나웅배]] 통일부총리가 이동 배치되는 등 24개 부처 중 절반인 12부 장관이 교체되었다.
 
=== 제4차 개각 ===
 
1996년 8월 경기침체의 책임을 물어 [[나웅배]] 경제부총리를 경질하고 후임에 한승수 전 상공부장관을 내정하는 등 경제부처 장관 6명을 교체하는 개각이 단행되었다.
 
=== 보각 ===
1996년 10월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각종 군내 사고 및 무기도입 비리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경질되었다.
 
=== 보각 ===
1996년 11월 [[공로명]] 외무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유종하]]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이 내정되었다. 후임 외교안보수석에는 [[반기문]]이 내정되었다.
 
=== 제5차 개각 ===
 
1996년 12월 [[농림부]], [[문체부]], [[통상산업부]] 등 8개 부처 장관이 경질되는 중폭 개각이 단행되었다.
 
=== 제6차 개각 ===
 
1997년 2월 한보그룹 부도 이후 한보그룹에 대한 제일은행 등의 대출에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 씨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한보그룹]] 관련 정계 스캔들에 [[김우석]] 내무부 장관이 연루되는 등 한보그룹 관련 정치 스캔들로 인하여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하였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따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포함하여 7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을 단행하였는데, [[이수성]] 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고건]] 전 서울시장이, [[경제부총리]]로 [[강경식]]이 내정되었다.
 
=== 제7차 개각 ===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8월 11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사실상 임기 마지막 개각을 단행하였다. [[법무부]], [[내무부]] 등의 부처의 장관이 교체되었다.
 
=== 보각 ===
1997년 11월 외환위기 직전에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임창렬]]이 내정되는 등 일부 부처의 개각이 단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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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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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IMF 외환위기]]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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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 제6공화국|*6-2]]
[[분류:문민정부|김영삼 정부]]
[[분류:대한민국의 정치|*6-2]]
[[분류:김영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