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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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후사를 이을 아이가 없던 이모 러시아 제국의 [[여왕|여제]] [[러시아의 옐리자베타|옐리자베타]]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표트르는 14살이 되던 해부터 러시아 궁정에 살면서 안할트제르프스트 공국의 공녀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조피 프리데리케]]와 결혼했다. 같은 독일 태생이었던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으나 조피가 이름을 러시아식인 예카테리나로 바꾸는 등 차츰 러시아인으로 변하며 국민적 지지를 얻을수록 독일에 아직 강한 애착을 가졌던 표트르는 그녀를 멀리하고 부재상 미하일 보론초프의 질녀 옐리자베타 보론초파라는 여인을 가까이 두었다.
 
1761년 12월 25일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함에 따라 새 황제로 등극한 그는 표트르 3세로 선포되었다. 표트르 3세는 옐리자베타의 장례기간 내내 사람들 앞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가 하면, 프로이센에 국가 기밀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추도 기간이 끝난 후 표트르 3세는 즉시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을 중지해, 멸망 직전에 몰리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을 구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를 눈 앞에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표트르 3세는 여전히 독일적 성향을 버리지 않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우상처럼 숭배했기 때문에 승자로서 마땅히 적에게 항복의 조건을 요구하는 대신 프로이센이 원래의 영토를 유지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러시아군의 제복을 프로이센과 비슷한 제복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는 자국인 러시아의 국익보다는 프로이센의 안위를 더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또한 [[루터교]]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음에도 별로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황제가 된 후에는 모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해버렸고, 성직자들에게 수염을 깎고 루터교의 [[목사]]처럼 옷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표트르 3세는 이제 공식석상에서도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 함께 지냈고 오직 황족에게만 허용되는 여러 가지여러가지 특권들을 그녀에게도 허용했다. 그에 반면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는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는 데다가 심지어는 감옥에 가두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계속되는 실정과 방탕한 생활로 표트르 3세는 급속히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잃어갔다. 그러나 황후 예카테리나는 그녀의 오랜 친러시아 성향과 교양 있는 행동으로 점차 민중의 환심을 얻어 남편과 큰 대조를 이루었다.
 
드디어 1762년 여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하였다. 국민적 지지를 얻은 그녀는 페테르부르크 주위의 모든 성문과 다리를 봉쇄할 것을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