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원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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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행동에 막부는 큰 충격을 받아 [[7월 12일]] “잠시 참아내고 어떻게든 그 뜻에 맞추어 줘서, 신속하게 배를 퇴선케 하여 뒷일를 도모하자”는 견지에서 국서를 수령하고 대답은 나가사키 네덜란드인 상관장을 통해 전달하도록 우라가 부교 이도 히로미치에 훈령을 내리고 협상을 진행하게 했다.
 
이때 제12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병치레를 하고 있었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는 [[7월 11일]]에 ‘국서를 수령하는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7월 14일]]에 페리 일행의 구리하마 상륙을 허용했고, 시모소네 노부아쯔노부아쓰 부대의 경비 아래 우라가 봉행 도다 우지요시와 이도 히로미치와 함께 페리와 회견을 했다.
 
페리는 그들에 개국을 재촉하였고,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 제독의 신임장, 각서 등을 전달했다. 막부는 “장군이 병치레 중이어서 결정할 수 없다”며 1년간 대답 유예를 요구했기 때문에 페리는 “대답을 듣기 위해 1년 후 다시 내항하겠다”고 대답했다. 이 회담에서는 문서의 전달만 이뤄졌으며 아무런 외교적 협상은 진행되지 않았다. 일본 측의 전권대사인 우라가 봉행 도다와 이도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본 측은 회견 끝마치고 2, 3일 후 퇴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페리는 7월 15일까지 미시시피 호로 옮겨타서 우라가에서 20마일 북쪽으로 에도의 항구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가서 장군에게 충분한 위협 시위를 하고 고시 앞바다로 뱃머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