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중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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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힘은 [[후한 화제|화제]]의 재위기 이후에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많은 황제들이 어려서 재위에 올랐고, 사실상 친척들이 더 많은 권력을 지녔다. 황제들이 성년에 이르러도 외척들은 권력을 내주길 꺼려했기 때문에, 황제는 권력을 찾기 위해 관리들과 [[환관]]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환관들과 외척간의 다툼은 그 당시 중국정부의 가장 큰 문제였다. [[후한 환제|환제]]와 [[후한 영제|영제]]의 재위기동안 환관들에 대한 관리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많은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고, 환관들은 저항에 참여했던 관리들을 처형하라고 황제를 설득했다. 몇몇 지방의 통치자들은 이렇게 억압적인 정치 분위기를 기회삼아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고 했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는 한나라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 더해서 당시 중국에는 많은 자연재해들과 여러 반란들 역시 존재했다.
 
184년 2월, [[도교]]적 교단 [[태평도]]의 지배자였던 [[장각]]은 형제였던 [[장보 (후한)|장보]]와 [[장량 (후한)|장량]]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난은 급속도로 퍼져 수십만에 이르렀고, 중국 곳곳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36개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고, 큰 요새는 만명 이상, 작은 요새는 6~7천명 정도의 군사를 가져 한나라 군대와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그들은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라는 구호를 내새웠다내세웠다. 영제는 [[황보숭]]과 [[노식]], [[주준]]을 보내 황건적을 물리치도록 했고, 지방의 관리들에게 군사를 보내 이를 돕도록 명했다. [[삼국지연의]]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황건적은 결국 패배하고 중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때문에 살아남아 산지에서 도적으로 살아갔고, 이로 인해 시대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중국 곳곳으로 퍼진 도적떼들을 다 처리할 능력이 한나라 군대에는 없었다. 188년, [[유언 (후한)|유언]]은 지방관들이 직접 그 지방을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 영제에게 건의했고, 영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주 (행정 구역)|주]]가 도적들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로 인해 중국 내부의 혼란은 결국 더 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