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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매산고등학교 졸업 후 구로공단 장갑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세무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군복무를 했으며, 이후 세무서에 복직하여 근무하던 중,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세무공무원을 그만두게 된다. 독학으로 4번의 도전 만에 제3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24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해 35세에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1997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파견되어 한보사건,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김현철]] 비리수사에 참여했고,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을 주임검사로 수사를 지휘했다. 2000년 2월에 수원지검에 사직서를 제출한 뒤, [[김대중]]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6대 총선에서 서울 강동(갑)으로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이던 이부영 의원에게 도전했으나 낙선하였다. 2006년 제4회 지방 선거에서 순천시장에 당선되어 2010년 제5회 지방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2년 3월 순천시장을 중도사퇴하고 제19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통합진보당 김선동 후보에게 져 낙선하였다.
 
== 생애 ==
=== 유년기 ===
노관규는 음력 1960년 9월 24일에 전라남도 장흥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기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장흥으로 이사를 해서 유치면 용문리에서 자랐다. [2]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다섯 살 때부터『천자문』과 『동몽선습』등을 배웠다. 1966년 유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마을 어르신에게 횡포를 부리던 청년을 제지하다 유치장에 들어가신 이후 집이 더욱 가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졸업 당시 최고상인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러나,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진학할 수 없어 낙망하던 차에 선생님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원서를 접수하고 극빈자 자녀들에게 주던 장학금을 받아 중학교에 입학했다.
 
=== 학창 시절 ===
유치중학교에 입학 후, [3]사춘기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반항적으로 되어갈 즈음, 무작정 버스를 타고 가출했다.
두달간 중국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막내 외삼촌에 의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 겨우 순천매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순천에 사시는 막내 작은아버지의 만화가게 문간방에서 숙식을 하며 공부했으며, 문학에 흥미를 가져 여러 시를 쓰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7년 말,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해 겨울,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 사회 생활 ===
[4]1978년 3월, 구로3공단 장갑공장 스트롱신주 주식회사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가죽원단을 작두로 자르는 일을 하며 사회 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장갑공장을 그만두고, 우유보급소 총무로 취직해 주경야독을 하며 공부를 했다.
그 후 세무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여 청량리 세무서에 발령을 받아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한창이던 1980년 5월에,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으러 고향에 내려간 후, 1981년에 입대하여 1984년에 병장 만기제대하고 도봉세무서에 복직하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며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사법고시 합격수기인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을 읽게 되면서 사법고시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사법시험 공부를 위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1987년에 사표를 냈다.
1987년에 공부를 시작해서 1991년에 제 33회 1차 응시에 합격했고, 1992년에 최종합격을 통보받은 후 1993년 3월, 제 24기로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여 1995년 3월 서울지검 북부지청으로 35세의 나이에 검사로 임용되었다.
1997년 1월, 한보사건이 터져 대검 중앙수사부로 파견되어 수사에 참여했고, 6월에는 대검 중앙수사부에 근무하면서 김영삼 전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비리사건 수사에 참여했다.
이후 1997년,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을 주임검사로 수사했고, 2000년 2월, 수원지검 특수부에 사표를 냈다.
 
=== 정치 활동 ===
[5]2000년 2월 수원지검 특수부 검사로 재직할 시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현직 검사가 변호사를 거치지 않고 정치에 입문한 경우는 이한동 전 국무총리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고 김대중 전대통령은 "검찰에도 유능한 인재가 있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훌륭한 정치인도 필요하다"며 정치입문을 권유했다고 한다.
신인 정치인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두가 출마를 말리고 열세지구이던 서울 강동 갑을 선택해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뒤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인 이부영과 대결에서 근소한 표차이로 낙선했다. 이 후 김대중 총재특보와 중앙위원,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역임했고, 2003년 한광옥 비서실장이 대북송금 특검에서 수사를 받을 때 특검의 부당성을 방어하는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이 같은 고 김대중 전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중앙정치권의 숱한 이합집산의 변화와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금까지 줄곧 민주당적을 고수하며 활동하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민선 4기 순천시장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도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정치적인 숙청으로 인해 현직 시장이 정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으나,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하여 민선 5기 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추진하던 중, ‘정원박람회를 하면 순천이 망한다‘며 정치적인 이익을 앞세운 전직 국회의원과 일부 단체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중도사퇴라는 정치적 시련을 맞게되어, 결국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진보당 김선동후보를 상대로 낙선했다.
 
=== 순천시장 재임시절 ===
그동안 민선시장들의 줄줄이 구속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순천시에 ‘물과 숲,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 정겨운 순천이라는 시정목표를 가지고 2006년 민선 4기 제5대 순천시장으로 당선되어, 2007년에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순천 해룡임대 산업단지를 조성하여 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한편, 생태수도 순천을 완성하기 위해 정원박람회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기관 청렴도가 도시의 경쟁력이라는 인식하에 시정을 펼친 결과 순천시의 청렴도가 "전남1위, 전국2위"라는 성과를 이뤘으며, 또한 교육, 복지, 환경,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지역의 환경 친화적 특성에 맞는 “대한민국 생태수도 순천”이라는 타지역과 차별화된 성장 전략목표를 세워 열정을 다해 시정을 이끌어 ´대한민국 최고의 목민관상´ 수상하였다.
2009년에는 장대공원 조성, 조례 호수 공원 조성 사업, 도시 외곽 생태 숲과 자연 휴양림 조성등을 통해 환경재단이 선정한 ‘2009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36인에 선정됐다.
또한, 2010년에는 제2회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 생태수도 완성을 위해 기획해 오던 정원박람회를 [6]순천의 자랑인 순천만의 자연을 최대한 살릴 수 있고, 도시 브랜드를 높이는 한편, 부가가치 창출과 관광객 유치 및 일자리 창출, 그리고 순천을 생태도시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원예생산자협회(AIPH) 제61차 정기총회에서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유치했다.
 
== 학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