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헤이우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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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더들리 "빅 빌" 헤이우드'''({{lang|en|William Dudley "Big Bill" Haywood}}, 1869년 2월 4일 ~ 1928년 5월 18일)는 미국의 노동운동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발기인 중 한 명이었으며, [[미국 사회당]] 집행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이었다. 20세기의 첫 20년간 헤이우드는 [[콜로라도 노동전쟁]], [[로렌스 직물섬유 파업]]을 비롯한 여러 중요한 노동쟁의에 관여했다.
 
헤이우드는 특정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는 직장이나 직종, 숙련도에 상관없이 하나의 노조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산별노조]] 사상의 옹호자였다.<ref name=pbs>[http://www.pbs.org/weta/thewest/people/d_h/haywood.htm "New Perspectives on the West – William "Big Bill" Haywood," PBS Interactive, 2001. Retrieved March 20, 2006.]</ref> 이는 당대에 널리 퍼져있던 [[직종별 노동조합]]([[미국노동총연맹|AFL]] 등)과 대조되는 사상이다.<ref name=cahn-137-169>William Cahn, ''A Pictorial History of American Labor.'' New York: Crown Publishers, 1972; pp. 137, 169.</ref> 또 헤이우드는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가 단결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많은 노조에서 충돌을 빚었다.<ref name=zinn-337-339>Howard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09; pp. 337–339.</ref> 헤이우드는 정치적 전술보다 [[직접행동]]을 선호하는, 말하자면 [[사회주의|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생디칼리슴|생디칼리스트]]였다. 이 때문에 1912년 사회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헤이우드 제명사건으로 사회당은 두쪽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총선에서 참패하는 곡절을 겪는다.<ref name="Roughneck199">Carlson, ''Roughneck,'' pg. 199.</ref> 사회당 집행위는 1913년 헤이우드를 다시 불러들였다.<ref name=dolgoff>Sam Dolgoff, "Revolutionary Tendencies in American Labor – Part 2," ''The American Labor Movement: A New Beginning.'' Resurgenc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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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헤이우드는 급진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유진 데브스]]는 헤이우드를 “노동의 링컨”이라고 불렀다.<ref>Bruce Watson, ''Bread and Roses: Mills, Migrants, and The Struggle for the American Dream.'' New York: Viking-Penguin, 2005; pg. 92.</ref> 파란만장한 과거와 외모에 자본주의에 대한 직설적인 발언들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자본가는 심장이 없다. 대신 돈지갑에 작살질을 하면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다.”<ref>Watson, ''Bread and Roses,'' pg. 93.</ref> 또 한번은 연설 모두발언에서 이런 말도 했다. “오늘밤 저는 계급투쟁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법조인마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꾸밈없이 이야기할 것입니다.”<ref>Watson, ''Bread and Roses,'' pg. 95.</ref> 물론 헤이우드의 과장스러운 언동의 재능은 위험하기도 했다. 신문들은 그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파업에 참여한 IWW 조합원 전체에 대한 체포를 정당화했다. 헤이우드가 자주 하던 말로는 이런 말도 있다. “강탈(Confiscate)이라! 그것은 좋은 것이다! 나는 이 낱말이 좋다. 이 낱말은 자본가를 벗겨먹음을, 그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온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 빼앗음을 위해서는 상당한 힘이 있어야 한다.”<ref>Watson, ''Bread and Roses,'' pg. 96.</ref>
 
=== 로렌스 직물섬유 파업 ===
[[파일:11-haywood-bohn.jpg|thumb|right|250px|헤이우드는 산별노조 원리에 대한 대중적 소개서를 1911년 [[찰스 H. 커 출판회사]]를 통해 발행했다.]]
빌 헤이우드가 WFM을 떠나 IWW를 조직하고 있을 때쯤 [[메사추세츠 주]] [[로렌스 (매사추세츠 주)|로렌스 시]]에서 그 유명한 [[로렌스 직물섬유 파업]]이 터져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12년 1월 11일, 로렌스 시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여 일손을 놓았다. 1주일 만에 2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IWW는 이미 로렌스 현지에서 활동하며 파업 지도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은 경찰을 부르는 것으로 응답했고, 파업은 급격히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현지의 IWW 지도자 [[조지프 제임스 에토르|조지프 에토르]]와 [[아르투로 지오바니티]]가 파업에 참여한 여공 [[안나 로피조]]에 대한 모살 혐의로 구금되었다.<ref>Fred W. Thompson, ''The IWW: Its First Seventy Years 1905–1975.''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1976; pg. 56.</ref> 그러나 그녀가 경찰 발포에 의해 사망했음을<ref>Carlson, ''Roughneck,'' pg. 166.</ref> 확인한 목격자가 열아홉 명이나 있었다.<ref>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249.</ref>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헤이우드를 비롯한 조직가들이 로렌스로 내려가서 파업을 맡기로 했다. 이후 수 주에 걸쳐 헤이우드는 파업의 여러 전술적 결정사항들을 지휘 또는 승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전술은 파업 노동자들의 굶주린 아이들을 뉴욕과 버몬트로 보내서 동정을 유발하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