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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정오 신군부는 정부로부터 계엄 확대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었다. [[노태우]]·[[정호용]]·[[황영시]] 등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확대 방안을 역설했으며,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한 군의 정치개입을 결정하도록 유도했다. 17일 오후 5시 전두환, [[주영복]] 등은 전군의 일치된 의견임을 내세워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시국수습방안의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비상기구 설치'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17일 오후 9시 중앙청에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하고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상황 속에서 국무회의가 열려 특별한 토의 없이 비상계엄 확대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5월 17일 24시 부로 비상 계엄령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ref>지역계엄 하에서 대통령-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으로 되어 있던 통수계통이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바뀌게 돼, 군부의 권한이 더 강해진다.</ref>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대학교 휴교령·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벌인 불법조치였다. 5월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한 뒤 무력으로 봉쇄했고,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직전, 보안사에서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하면서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역시 가택연금 처분내리는 정치 탄압을 감행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국회와 정부에 의해 진행된 개헌 논의가 중지됐다. [[서울의 봄]]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ref name= '2699명'>[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60805105700084&p=yonhap 12.12, 5.18및 비자금사건 논고문]</ref>
 
이 과정에서 전라북도 전주 소재 전북대 학생회관 3층에서 유인물을 작성중이던 전북대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가 전북대에 침입하여 학생들을 연행하던 금마 7공수부대원에게 정수리를 개머리판에 강타당해 학살되어 1980년 5.18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ref name= '이세종'>[http://m.blog.daum.net/enature/15849754 4월5일 UC Berkley 강연 -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 열사]</ref>
 
== 신군부의 정권장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