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하이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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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ydn portrait by Thomas Hardy (small).jpg|framed|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16살에도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음악가이다.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 시대 음악|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 일생 ==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동쪽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와 같은 해의 태생으로, 이 무렵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 (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는 절대주의를 확립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이며, 요제프는 누나 한 사람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고 수양아저씨 프랑크(프랑스)의 집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슈테판 대성당|성 스테파노 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그 동안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 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칼 폰 모르친(Karl von Morzin) 백작의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연상의 아내에게서 가정의 행복을 평생 느끼지 못한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인 헝가리의 귀족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의 관현악단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 관현악단의 관리와 훈련이 그 주임무였으며, 이로써 관현악 작법도 현저히 진보했다.
 
1762년 파울 안톤 후작이 타계하자 형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예술의 옹호자인 동생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니콜라우스]] 후작이 뒤를 잇는다.그의 후원아래 관현악단은 충실히 확대되고 악장으로 취임한 하이든은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후작은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에스테르하자(Eszterháza) 별궁을 세우고 함께 여름 동안에는 전속 음악가도 동행하였는데, 1772년 여름 후작의 체재가 길어지자 《[[고별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는 유명한 일화가 생겼다. 이러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지런하고 충실한 악장 하이든과 단원과의 사이는 매우 원만해서, 교향곡 외에도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많이 썼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서 [[고전 시대 음악]]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 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안 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 시|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 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 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에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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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든의 업적 ==
하이든은 18세기 후반의 빈 고전파에서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주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 등의 기악형식의 완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만년의 2개의 [[오라토리오]]나 [[미사곡]]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볼 수 있다. 하이든의 작곡활동은 외적, 내적인 특징에 따라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된다.
=== 1760년경까지 빈 ===
가장 초기의 작품에서는 특별한 예술적 개성은 볼 수 없으며 오히려 토착적인 전통과의 결합(디베르티멘토나 그 밖의 게임음악)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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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서야 자신이 속았다는것을 알아차린 그 귀족은 분노했으며 그들을 즉시붙잡아 조사했으나 이미 하이든의 머리는 익명의 사람에게 팔아버린 뒤였으며 갖가지 수소문하였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후 100여년이 넘도록 하이든 머리는 유럽전역에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는다.
 
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이든의 후손들은 생전에는 그의 머리를 찾기위해 노력했고 자신이 죽을때는 후손에게 반드시 조상의 머리를 찾아야한다는 유언을 대대로 남기고 있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번사태에 대해서 "이 사건은 국제적 망신이며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조국의 음악가 머리가 도굴당해 온 유럽에서 장식품처럼 여기저기로 팔려나가 것은 두고볼수 없다" 는 등 많은 의견과 비난여론이 빗발쳤지만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데 진전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수소문끝에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데는 성공하여 하이든의 후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반환소송을 청구하였지만 그 유해의 주인은 소송반환에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여 되찾는데 어려움을 맞았고
설상가상으로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인해 유해반환소송은 잠정중단하게 된다.
 
그러다가 1954년 6월 마침내 유해반환소송에 승소하여 하이든 머리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무덤에서 파헤쳐져 머리가 분리된지 무려 145년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주민 수십만명이 나와 145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하이든의 머리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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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commons위키공용|Joseph Haydn}}
* [http://www.valeriodistefano.com/haydnmasses.htm Missa Brevis Sancti Johannis de Deo] MP3 Creative Commons Recording
* [http://www.sf-media.12hp.de/index.php?option=com_content&view=category&id=19%3Ahaydn-complete-pianosonatas&Itemid=6&layout=default&lang=en/ Complete recording of Joseph Haydns Pianosonatas on a sampled Walther Pianofo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