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요시 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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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쿄 (1308년)|엔쿄]](延慶) 원년([[1308년]]),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당시에는 천황이 아니었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애초에는 여섯 살 때 소운 법친왕(尊雲法親王)으로써 천태종(天台宗) 3대 문적(門跡)의 하나인 미정문적(梶井門跡) 산젠인(三千院)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다이토노미야(大塔宮)라는 궁호는 히가시야마(東山) 오카자키(岡崎)의 홋슈지(法勝寺) 9층탑 주변에 문실(門室)을 두었던 데서 연유한다. 쇼추(正中) 2년([[1325년]])에는 문적을 이어받아 문주(門主)가 되었고,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방침에 따라 가레키(嘉暦) 2년([[1327년]]) 12월부터 [[겐토쿠 (1329년)|겐토쿠]](元徳) 원년([[1329년]]) 2월까지,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천태좌주가 되었다.
 
[[파일:護良親王出陣図.jpg|250px|섬네일|오른쪽|막부 타도를 위해 출진하는 모리요시 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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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부 타도의 공로자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를 경계해, 막부를 타도한 뒤에도 교토로 가지 않고 진키 산(信貴山, 지금의 나라 현奈良県 이코마 군生駒郡 헤구리 정平群町)을 거점으로 다카우지를 견제하였다. 부황이 행한 겐무 신정(建武新政)에서 친왕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병부경(兵部卿)으로 임명되어 상경하고, 다카우지(尊氏)는 진슈후쇼군(鎮守府将軍)이 되었다. 친왕은 다카우지 견제를 위해 자신의 연척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와 함께 도호쿠 지방 지배를 목적으로 노리요시 친왕(義良親王, 훗날의 고무라카미 천황)을 쇼군으로 삼아 지카후사의 아들인 아키이에(顕家)가 무쓰노카미로써 보좌하는 형태로 무쓰 쇼군부(陸奥将軍府) 설치를 진언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카우지 뿐 아니라 부황 및 그 총비인 아노 야스코(阿野廉子)와 반목하게 되고 다카우지를 암살하기 위해 병사를 모아 辻斬りを암살을 벌이나기도하나, 이 일로 세이이타이쇼군에서 해임되고 [[겐무]](建武) 원년([[1334년]]) 겨울에는 황위 찬탈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고다이고 천황의 명을 받은 나와 나카토시(名和長年)、유우키 지카미쓰(結城親光) 등에게 체포, 아시카가측에 넘겨져 가마쿠라로 압송되고, 가마쿠라 쇼군부(鎌倉将軍府)에 있던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直義)의 감시를 받게 된다.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과의 불화는 막부 타도 과정에서 막부 토벌의 윤지를 내렸던 부황을 제치고 친왕이 먼저 영지를 내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황위 찬탈의 혐의는 친왕에게 억울하게 덧씌워진 것이다. 친왕이 실각할 전조는 모리요시를 지지하던 아카마쓰 엔신(赤松円心) 세력이 크게 저하된 것이었다.
 
이듬해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가 반란을 일으키고(나카센다이의 난) 간토 각지에서 아시카가 군이 호조 군에게 패하는 가운데, 닛카이도가타니(二階堂ガ谷)에 있는 도코지(東光寺)에 유폐되어 있던 모리요시 친왕은 다다요시가 보낸 후치베 요시히로(淵辺義博)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예전 세이이타이쇼군이 된 경험이 있는 모리요시 친왕이 도키유키에게 옹립될 경우, 모리요시 친왕이 황족 쇼군으로써, 호조 도키유키가를 싯켄(執権)이 되는 형태로써 가마쿠라 막부가 부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가마쿠라에 설치된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은 교토에 무사히 송환되었고, 모리요시 친왕 피살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왕이 피살되고 이틀 뒤 가마쿠라는 막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