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플램스티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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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플램스티드는 1675년 2월 2일 런던에 도착하여 무어와 함께 [[런던탑]]에서 지내고 있었다. 플램스티드가 천문 관측 경력이 있음을 알아본 위원회의 Titus 덕분에 그는 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플램스티드는 왕립위원회의 요구로 공식 증인으로 출석하였고, 생 피에르의 주장을 검증할 목적으로 실제 관측자료들을 제시하였다. 플램스티드의 질문으로 생 피에르의 형편없는 천문학 지식이 그대로 드러났다.<ref name="clark">데이비드 클라크·스티븐 클라크, 2000 : 뉴욕, 《독재자 뉴턴》, 이면우 옮김, 2002 : 서울, 몸과마음.</ref>{{rp|57}} 플램스티드가 제공한 정보에 근거하여 작성된 왕립위원회의 보고서의 결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생 피에르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둘째, 경도를 측정하는 간단한 방법은 아직 없고, 셋재, 왕은 더 정확한 천문지도를 작성하고, 또 경도 측정에 요구되는 정밀도로 달의 움직임을 기록할 수 있도록 천문대를 설립할지 검토하여 그 적임자를 천문대장에 임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왕의 대신이었던 조너스 무어는 수학과 천문학을 좋아하기도 하여 젊은 플램스티드를 알게 된 후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무어의 강력한 지원으로 1675년 3월 4일 28세의 플램스티드는 최초의 [[왕실천문관]], 당시 명칭으로 왕실 천문대장(The King's Astronomical Observator)으로 임명되었다. 봉급은 1년에 100파운드였다. 1675년 6월 22일 찰스 2세는 '완벽한 항해와 천문학을 위해 특정위치의 경도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왕립천문대 건설을 약속하고, 천문대를 세울 장소로 그리니치의 왕실영지와 520파운드의 건설비용을 댄다.<ref name="clark"/>{{rp|58}} 찰스 2세는 천문학자들이 거주할 집과 다소 화려한 천문대를 설계하는 임무를 크리스토퍼 렌에게 위임했다. 1675년 8월 10일 시공식에서 플램스티드가 초석을 놓았다.
 
1676년 2월 [[왕립학회]]의 회원 자격을 얻었고, 그 해 7월 완공된 천문대로 살림을 옮겨 1684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