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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Jules massenet.jpg|right|200px|thumb|쥘 마스네]]
 
'''쥘 에밀 프레데리크 마스네'''({{llang|fr|Jules Émile Frédéric Massenet}}, [[1842년]] [[5월 12일]] - [[1912년]] [[8월 13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그는 오페라 작품으로 유명하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그 작품들은 뒤에 대부분 잊혀졌으나, 1980년대 이후 주기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마농]]”과 “[[베르테르 (오페라)|베르테르]]”는 한세기를 넘어서 꾸준히 상연되었다.
 
==일대기==
마스네는 외곽의 작은 [[촌락]]이자, 이제는 프랑스 [[루아르]] 지역 [[생테티엔]]의 한 부분인 [[Montaud]]에서 태어났다. 그가 11살일 때 그의 가족은 [[파리 시]]로 이주하였고, 마스네는 그곳 음악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862년 그는 [[로마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고, [[로마]]에서 3년간 지냈다. 마스네의 첫번째 오페라는 1867년 [[오페라 코미크 ]] 극장에서 1[[막]]짜리 프로덕션이였으나, 그가 [[차이콥스키]]와 [[샤를 구노|구노]]처럼 칭송을 받게된 작품은 그의 드라마적인 [[오라토리오]], 《[[마리아 막델리나 (마스네)|마리아 막델리나]]》였다.
 
마스네는 잠시 작곡 작업을 중단하고 [[프랑스-프러시안 전쟁]]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1871년]]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작곡자로 돌아오게 되었다. 1878년부터 그는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가와 교수로 봉직하였고, [[구스타프 샤르팡티에]], [[레이날도 한]]과 [[샤를 쾨클랭]]을 제자로 두었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오페라 《[[마농]]》(1884년), 《[[베르테르 (오페라)|베르테르]]》(1892), 《[[타이스]]》(1894)가 있다. 유명한 후기 오페라인 《[[돈키호테 (오페라)|돈키호테]]》는 1910년 [[몬테카를로]]에서 전설적인 러시안 [[베이스 (성악)|베이스]] 가수인 [[표도르 샤리아핀]]이 표제 역을 맡아 공연하였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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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클라르몽드]], Esclarmonde - 1889
* [[동방의 세 현인]], Le mage - 1891
* [[베르테르 (오페라)|베르테르]], Werther - 1892
* [[타이스]], Thaïs - 1894
* [[마농의 초상]], Le portrait de Manon - 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