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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에 대구로 내려가 있던 대양출판사는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남산 아래 양동에 자리를 잡는다. 이때부터 김익달의 출판에 대한 욕구는 봇물처럼 터져, 한국 잡지 문화의 터전이 되는 많은 잡지와 기발한 착상을 담은 많은 출판물을 내놓아 한국 출판 문화에 새로운 물꼬를 터놓게 된다. 이 시기에 김익달이 시도한 새로운 출판 방식들은 그 후 우리 출판 문화가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데 주춧돌 역할을 해 낸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많은 필자가 방대한 자료를 한데 모아 기획·출판하는, 소위 '집대성 출판 방식'의 시도이다.
 
이러한 출판 방식과 함께 김 선생의김익달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새로운 편집, 제작 방식의 시도이다. 판형을 다양하게 하고 화보를 이용해 시각적 효과를 높임으로써 독자들의 독서 욕구를 늘려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익달은 평소 지녔던 출판에 대한 생각인 '읽히는 책, 쓰이는 지식'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김익달의 새로운 출판 방식은 자연히 제작 측면에서도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인쇄, 새로운 책의 모양들의 속속 등장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컬러 인쇄의 등장이다. 당시 출판계로 볼 때는 일종의 인쇄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컬러 인쇄는《학원》 창간호 표지였다. 그 후 학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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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달이 서울 수복 후 서울에서의 출판 시대를 열면서 내놓은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화집이라고 할 수 있는 마해송 씨의 《떡배, 단배》였다. 이어 그는《학원 명작선》, 《세계위인문고》(전 50권) 등 청소년들의 정신의 밑거름이 될 만한 출판물들을 기획, 세상에 내놓는다.
 
청소년물에 힘을 쏟던 김익달은 1955년 이 땅의 최초의 본격 여성지가 되는 《여원》을 창간하여, 튼튼한 사회의 기반이 되는 여성 문화 형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김익달은 《여원》을 창간하면서 '여성문화주의를 통한 여권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즉, 여성 중심의 세계관이 형성될 때 세상은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김익달은 이미 '여성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여성 운동을 김익달은 그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이미 출판물을 통해 실천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남성과 대립되어 남성을 극복의 대상으로서 보는 여성 운동이 아니라 여성문화주의를 내세워 모성적 세계관으로 끌어들이려는 여성 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원》 창간사에 나타난 김 선생의김익달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해방 10년을 맞이하는 오늘, 과연 어느 정도의 남녀 동등권은 획득되었으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여성으로서의 이바지함은 얼마나 컸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무언가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 이유를 살피건대, 여성들의 문화 의식이 높지 못하다는 결론에 용이히 도달하게 된다. 어느 나라든, 여성의 문화 의식이 얕고서 그 국가 사회의 번영 발달을 바랄 수 없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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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달은 언제나 말보다 실천을 앞세웠던 행동파였다. 농촌에 대한 생각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의 손이 닿는 것이면 언제나 실천에 옮겼다. 심지어 자신이 키워낸 장학생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농촌에 대한 생각을 얘기했다고 한다. "머리 좋은 장학생이 법대에 가는 것을 한 번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장학생 가운데 농대에 가서 나중에 농민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을 지닌 학생이 있으면 얼굴에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김익달은 먼저 농촌이 잘 살아야 이땅의 형편이 좋아진다는 신념을 돌아가실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학원장학생 출판인 윤구병 씨(충북대 교수)는 기억한다.
 
또한 김익달 선생의 생각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진로를 농학으로 바꾼 학원장학생 출신의 강봉순 씨(한국농촌경제연구원실장ㆍ서울대 교수)는 "농업의 성장위에 공업의 성장이 뒤따라야 안정적인 경제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강조하시던 김 선생의 모습이 늘 떠나지 않는다."고 회고한다. 원래 농촌 출신으로 농촌의 현실을 몸소 겪어 알고 있던 김익달이 농촌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갖게 되는 것은 195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던 '국제출판협회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유럽의 농촌을 보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당시 라인 강변을 본 농촌의 인상을 생전에 김 선생은김익달은 이렇게 밝혔다.
 
"나는 라인 강변과 30도 이상의 경사진 산기슭에다 석축을 쌓고 감자를 심는 독일 사람들의 농사짓는 법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귀국한 뒤 우리도 잘사는 농촌을 만들어 보자, 그러기 위해 축산 마을을 일구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내가 직접 축산 사업을 하자는 게 아니고 잘사는 농촌의 모델 하나를 만들어 열심히 키워 보자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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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월 1일이었지요. 당시 저는 고등학교 재학생이었어요. 아버님을 따라 황간역에서 기차를 내려 트럭 한 대를 빌려 타고 눈 덮인 산길을 이십 리 정도 갔어요. 눈이 몹시 내리고 있었고, 산길이라 험해서였는지 안 가려는 운전수를 겨우 달래 차비를 두 배를 주고 세 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어요. 그때 산골사람들에게 주려고 서울에서 준비한 생 필품꾸러미가 큰 짐이었지요.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일곱 시 우리는 산마을에 도착했어요. 아버님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되었지만, 아버님은 마을 한복판 초당을 얻어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 마을을 잘살게 하도록 돕겠다는 뜻을 밝혔지요. 처음에는 외지의 낯선 사람에 대해 모두들 경계하는 눈치였고, 국회의원 출마나 정치 운동을 하러 온 걸로 알더군요. 이틀을 걸려 설득한 끝에 마을 사람들에게 아버님의 뜻이 전달되더군요. 결국 마을 한가운데 열 여덟 평 짜리 공회당을 짓게 됐고, 그걸 이곳 청년 회원들이 운영하면서 축산 마을로 가꿔 나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 후 아버님은 이 년 정도 그 마을을 지원했습니다."
 
이때는 '새마을 운동'이라는 말이 나오기 훨씬 전이며, 한창 정부의 공업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농촌을 돌아볼 겨를이 없던 때였다. 그러나 이 마을에 쏟은 김 선생의김익달의 이상적 축산 마을 조성 의욕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 당시 농민들이 너무 의타적이었고 스스로 돕고 힘을 모아 보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차차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 한 모델 마을을 가꿔 농촌 근대화의 집념과 함께 이상향을 이룩해 보겠다는 그의 소망은 주춤했다. 그래서 한 마을을 근대화의 모델로 가꿔 나가기보다는 출판 사업을 통하여 전국적인 근대화 운동을 실천해 보자는 것으로 뜻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64년 4월의 농민을 대상으로 한 월간지 《농원》 창간이었다.
 
김익달이 《농원》 창간을 결심하게 된 데도 단순히 농촌 경제의 활성화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2년여 걸친 농촌 지원을 통해 우리나라의 가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터득해 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 지원만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즉 정신의 개혁, 그 중에서도 일제 시대와 해방 후 미군의 원조에 길들여진 의타심을 철저하게 몰아내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것도 국가의 기본이 되는 농촌의 개혁이 먼저 이루어져야 나라 전체가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김 선생의김익달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농원》 창간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국민은 우선 근면과 노력으로 스스로 생활 향상을 꾀하여야 하겠습니다. 남을 의존하거나 구원의 손길만을 바라는 태만은 그대로 기아만을 남겨 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어째 우리는 조상이 물려 준 가난을 그대로 또 자손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팔소매를 걷어올릴 때를 맞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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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김익달이 출판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김익달은 몇몇 매체와 출판물을 통해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언제나 새로운 일에 투자하여 사회 환원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김익달 자신은 천성적으로 근검·절약하는 성품이라 겨울에도 빛 바랜 외투를 입고 다닐 정도로 생활이 검소했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회고한다.
 
학원사 부사장을 지낸 바 있는 이규준 씨는 김 선생의김익달의 일상 생활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보아 온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분의 일상 생활은 지극히 규칙적이고 합리적이며 대단히 검소했다. 공과 사가 분명했고 사치나 허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출판에는 남다른 기지와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휼빈과 육영에도 사업 의지가 대단했다. 불우한 이웃은 되도록 도와 주되 그 대상은 반드시 자조하는 사람 중에서 선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러한 생활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 회사 운영에도 기업주 위주의 축재나 업체의 확장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의 후생과 복지에도 중점을 두고 거래선과도 공생공영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반적으로 지급되는 월정급은 물론, 연말이나 추석, 김장철 등에 지급되는 상여금에 이르기까지 보수는 당시 국내 출판업계의 최고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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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 한국출판연구소 소장을 지낸 바 있는 주채원 씨는 1960년대에 학원사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라며 다음과 같은 김익달의 기업 정신을 전한다.
 
"제작비 지불 관계로 김 선생이 부채 리스트를 보여 주시는데 거기에는 사원들에게 집 사 줄 액수도 쓰여 있었다. 자금이 남아돌아서 집을 사 주는 게 아니고 빚을 얻어서라도 해야 할 일은 한다는 것이 그분의 소신이었다."
 
이와 함께 김 선생은김익달은 자신이 창간한 많은 매체나 출판물들을 독립시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잡아 주기도 했다. 이것은 기업이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소유물이며, 더불어 살아가면서 도와야 한다는 평소의 기업관을 실천에 옮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이것은 오늘날 우리 출판계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밑거름이 되는 셈이다.
 
1969년, 《주부생활》의 경우에서도 김익달의 이러한 기업 윤리가 적용된다. 1965년 창간되어 한국 여성지를 주도하던 《주부생활》을 김익달은 학원사가 어려워지자 독립시키기로 결정한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대충 이러했다. 김익달은 가지고 있던 빌딩을 팔아서 《주부생활》 직원들의 퇴직금으로 잡고 거기에 각각 30~50%를 가산해서 그 액수에 해당하는 《주부생활》의 주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주부생활》을 독립시킨다. 그러니까 사원들 모두가 그 당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퇴직금 액수에 30~50%를 가산한 액수만큼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대신 당시 적자를 내고 있던 학원사의 주식 일체는 모두 김 선생이김익달이 액면 가격대로 샀다. 그리고 살림을 나가는 《주부생활》에는 2000여만 원을 따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니까 김익달은 《주부생활》을 독립시키면서 최근 우리나라 기업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우리사주제'를 이미 실시한 것이다.
 
독립 방식은 다르지만 그 동안 김익달이 매체나 지형을 떼어주어 출판사를 차린 사람은 30여 명이나 된다. 물론, 회사를 하나 떼어 주는 데 있어서도 특별한 조건은 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의 능력과 회사의 형편이 닿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일들이다. 정말 마음을 비우지 않거나,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회사를 떼어 주거나, 지형을 독립시켜 그들의 꿈을 열어 주는 일에서 기업하는 보람을 더 느꼈다는 김익달은 생전에 늘 이런 생각을 말해 왔었다고 주변 사람
들은 전한다.
 
"저도 어려서 고용살이로 시작했으니까 그분들의 고통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포부가 있는 법이니, 그 뜻있는 분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제 책임이기도 하죠. 그러기에 저는 사업가는 되지 못합니다. 벌기보다 쓸 생각이 먼저 앞서 있으니……."
 
=== 출판 문화계의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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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익달이 창간한 매체 중에 《주부생활》과 《학원》은 현재 민주일보·학원사가 계속 발행해 오고 있으며, 《여원》은 여원사에서, 《진학》은 진학사에서, 그리고 《독서신문》은 독서신문사에서 각각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다.
 
=== 새 세대의 텃밭을 일구다 ===
김익달이 어느 출판인들과 다른 점은 출판을 위한 출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를 가리켜 '한국 출판의 개척자', '출판 제 1세대의 대표적 인물', '잡지 계의 대부', '기획의 귀재'등으로 부를 만큼 그가 한국 출판계에 남긴 업적은 지대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나라 사랑이라는 심지 곧은 생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그가 출판을 통해 끝없이 추구한 것은 나라의 미래를 꾸려 나갈 새 세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학원》을 통해 나타났고, 이와 함께 추진한 학원 장학생 제도나 학원문학상 등을 통해 50년대 청소년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밀알회'''다. 학원장학생 출신들이 김익달의 밀알 정신을 따라 만든 밀알회는 현재 김익달의 뜻대로 이 사회의 밀알으로써 서서히 새로운 열매를 보여 주고 있다. 김익달이 생전에 학원장학생들에게 늘 강조했던 밀알정신을 밀알회원인 민주일보사의 김경회 국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자, 그 땅이 메말라서야 싹이 터서 자랄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그것은 싹이 틈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갖고 많은 결실을 가져오는, 말하자면 그 한 톨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이 밀알이 지닌 가능성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땅에 묻힌 한 톨 한 톨의 밀알이 밑거름이 되어 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니, 어제의 희생의 대가로써 오늘을 가져 왔고, 또 오늘의 희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셨어요. 그러면서 메마른 땅에 떨어진 한 톨의 밀알이 썩지 않는다면 어찌 푸른 초원이 이룩될 것이냐? 지금 푸르러 가고 있는 초원은 먼저 떨어진 열매와 땅의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인지 자연히 발생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장학생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했지요. 또한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당부하는 말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어요. '장학생 여러분들은 바로 밀알 같은 존재다. 알찬 밀알일수록 바람직한 열매를 맺게 된다. 여기서 제군들에게 한 가지 의무가 주어지는데, 제군을 길러 낸 이 풍토에 한 줌의 기름진 흙을 보태라는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새싹들이 얼마든지 있다. 제군의 손으로 그들에게 한 줌 흙이라도 북돋아 준다면 그것이 결코 헛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힘이 자라는 한도에서 정성을 다하여 제군이 받은 밑거름을 한층 더 보람있게 해 주기 바란다.'"
 
1953년 1월에 제1기 학원장학생으로 뽑힌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던 1957년에 '장학생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밀알회는 그동안 발행해 오던 회지 《이삭》을 1960년에 《'''밀알'''》로 바꾸면서 '밀알회'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2010년 기준 밀알회는 751명이 회원으로 있으면서 김익달의 밀알 정신을 실천해 가고 있다.
 
그리고 김익달은 뜻을 세워야 할 청소년들을 만나면 언제나 용기를 불어넣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뜻을 세워서 정도를 지킬 것을 강조한 김익달의 신념은 《밀알》 회지의 권두언에서 잘 나타난다.
 
"올바른 길, 정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살리는 길이요, 남을 살리는 길이요, 동시에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나는 남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길은 정도가 아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라를 해치는 길은 정도가 아니다. 정도는 언제나 나와 남과 나라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말에서도 김익달의 나라 사랑 정신을 잘 읽을 수 있다. 즉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에게 나라 사랑 정신을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나라의 장래를 차근차근 다져 나간 것이다. 한때 학원장학회 이사로 있던 아동문학가 마해송이 1967년 세상을 떠났을 때 김익달은 몹시 슬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해송 선생의 나라 사랑과 김익달의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동지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던 탓이리라. 김익달은 마해송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렇게 《밀알》지 권두언에 적고 있다.
 
"선생은 아동문학가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고결한 선비요, 청빈한 지사로서 존경해 왔다. 특히나 그분이 세상을 떠나실 때 남긴 말씀은 우리들 평생에 큰 교훈이 되었다. '어린이를 위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어린이를 위한 일을 천직으로 알고 일생을 사셨는데 그것이 곧 애국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셨던 것 같다."
 
이러한 김익달의 생각은 이 나라 어린이 신문의 효시가 되는《새나라신문》을 1960년에 창간하기에 이른다. 타블로이드 판 4면 체제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새나라신문》은 1면에 일반, 사회 기사를 넣고, 2면과 3면은 과학 기사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4면은 문화 기사로 채웠다. 그리고 만화가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 조흔파의 연재소설 등을 실어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다. 이 신문의 체제는 어린이 신문 모범적인 예가 되어 그 후에 각 일간 신문에서 나온 각종 어린이 신문이 이 체제를 따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익달은 이 신문에서 특히 과학 기사에 비중을 두어 어린이들이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키워 나가도록 유도했다. 이 또한 과학이 발전하지 않고서는 과학이 주도할 미래를 가꾸어 나갈 힘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굳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새 세대를 소중하게 키워 나가던 김익달의 이러한 생각이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학원장학회를 만든 지 17년이 지난 1969년이었다. 새싹회(회장 윤석중)에서 13회 소파상 수상자로 김익달 선생을 선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을 남 앞에 내세우기를 꺼려했던 김익달은 처음에는 이 상의 수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적격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윤석중 씨에게도 굉장한 항의를 했어요. 난 사업가일 뿐 아동을 위해서 일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사양을 하려고 했는데 신문에 발표해 버린 바람에 그냥 타기로 했어요. 너무 사양하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고 해서……. 부끄러워요."
 
당시 수상 소감을 묻는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소파상은 소파 방정환을 기리기 위해 새싹회가 정한 상으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 큰 일을 한 사람을 찾아내어 격려하는 상이다. 따라서 새싹회에서는 주저없이 김익달을 수상자로 결정했던 것이다. 윤석중 씨는 그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하나 감격적인 상이었지만 특히 김익달 선생에게 드린 제 13회 상은 역경에서 대성하신 분이 역경을 뚫고 학업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학도들에게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뒤를 대 주어 젊은 시절에 맺힌 한을 장학 사업으로 풀고 계신 분을 찬양하는 상이었다."
 
김익달은 국민훈장 동백장(1970년)을 비롯하여 대통령 표창(1969년)·국무총리 표창(1968년)·서울특별시 문화상(1962년)·제1회 한국출판 문화상(1960년) 등 개인· 사회단체·행정부 등에서 주는 감사장·표창장·공로상·문화상·훈장 등을 수없이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쁘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은 소파상이었다고 생전에 늘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한다.
 
《새나라신문》과 함께 김익달이 청소년을 위해 창간한 것이《독서신문》이다. 1970년에 창간된 주간 단위의《독서신문》은 창간 소식 자체가 화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주간신문 등록은 하늘의 별따기였고, 기존 주간 매체 자체가 없었던 터라 모두들 어떤 모양의 시문이 나올지 궁금했던 것이다. 출판인들이 주주로 된 《독서신문》은 문학과 예술을 위주로 한 교양 신문이었다. 1970년대 초반이니까 광고 시장이 넓지 못했고, 신문의 성격상 책 광고를 위주로 해야 했기 때문에 창간 초기부터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익달은 광고가 모자랄 때마다 학원사 광고를 대신 실어 가며 이 신문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독서신문》이 나오고는 있지만, 《독서신문》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김익달이 경영하던 시절의 이미지로 머리 속에 남아 있다.
 
=== 국민 건강 운동 ===
이미 《농원》과 '이상적 축산 마을' 시도를 통해 농촌 근대화를 실천에 옮겼던 김익달은 말년까지 국민건강운동을 위한 출판으로 국민 의식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특히 농업을 '창조하는 사업국가의 기틀'로 본 김익달의 생각은 단순히 그가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나온 생각은 아니었다. 김익달은 누구보다도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일찍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개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익달은 확실히 의식 개혁의 개척자였다. 그가 농촌 개혁을 부르짖는데는 우리 현실을 바로 보고 우리의 여건을 충분히 파악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5·16 이후 공업화가 국가 시책으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던 때에 쓴 다음과
같은 글에서 그의 합리적인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공업의 대부분은 진실한 의미에서의 생산이 아니라 그 원료를 미국에서 도입 재수출하는 하나의 가공업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농업 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재화를 이동, 가공하는 것이 아니요, 지하에서 채굴해 낼 수도 없는 참다운 생산, 즉 창조하는 산업인 것이다. 가령 고구마를 대량 생산해서 이것을 전분 원료나 전분으로 만들어 외국 수출에 활기를 띤다면, 첫째 고구마를 재배하는 농민의 수익이 증대될 것이요, 둘째는 고구마를 가공하는 공장도 또한 수익이 증대되어 기업이 발전해 갈 것이다……(중략)……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는 공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농촌의 근대화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김익달은 농촌 근대화의 한 방법으로 '식생활 개선 범국민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즉 쌀과 함께 보리ㆍ감자를 주식으로 하자는 운동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농촌의 생산물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쌀농사 외에 밭농사를 활성화시켜 농촌 경제를 부흥시키자는 것이요, 또 하나는 쌀보다 건강에 좋은 보리와 감자를 주식으로 함으로써 건강한 국민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2천년대 인구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닥쳐 올 식량 위기
를 대처하자는 큰 뜻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김익달은 이 운동을 자신이 먼저 실천해 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경우를 들어가며 혼식을 권장했다고 한다.
 
1980년에는 농수산부에 '식생활 개선 범국민 운동 제창 건의'란 제목으로 건의서를 제출하여, 보리 혼식을 국가 시책으로 펼쳐 줄 것을 당국자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이때 농수산부 장관은 김익달의 건의서에 감동하여 농정에 반영시키겠다는 회답과 함께 감사장을 보내 온 일도 있었다. 김익달은 식생활 개선을 추진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정리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식생활 개선 운동을 펼쳐 나갔다. 식생활 개선의 방법으로는 '교육', '범국민 운동의 전개', '바꾸어 나가야 할 식생활 습관' 등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초등학교 교과 과정을 통해 학생들의 의식을 개혁시키고, 정부 차원에서 매스컴을 통한 혼식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일과 혼식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일, 그리고 쌀과 함께 감자나 보리를 주식으로 삼아 식생활 습관을 개선할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는 곧 튼튼한 국민이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진리를 실천해 낸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