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출처가 진수의 삼국지입니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가 아니라요. 진수의 삼국지는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
1번째 줄:
{{한국사}}
'''가락국'''(駕洛國)은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가야]] 연맹체의 맹주였다. 그러나, [[4세기]] 말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400년]]에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종발성]] 등 [[낙동강]]의 동쪽과 북쪽 지역(현재의 [[부산]], [[양산]], [[밀양]])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반파국]]과 [[안라국]]에 연맹체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줄 22 ⟶ 21:
=== 건국 ===
김해 일대는 장유면 등지에서 지석묘 등의 청동기유적이 발견되어 태고적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단군조선이 [[위만]]에게 병탄되고 [[위만조선]]이 내부혼란과 [[전한]]의 개입으로 패망한데 이어 [[고구려]]가 부여에서 분리되어 건국되는 등 북방의 혼란이 가중되자 일련의 북방 조선유민들의 남하가 이루어져 삼한일대의 사회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 일단의 집단중에 박혁거세 집단이 경주에 정주해 [[사로국]]을 건국한 뒤 이를 중심으로 진한이 [[마한]]에서 독립한데 이어 [[온조]]와 [[비류]]로 대표되는 [[백제]]인들이 남하하여 한강일대를 기반으로 [[백제]]를 세운 뒤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을 합병함으로써 삼한을 지배하던 마한의 세력이 변한에서 소멸하자 변한도 크게 동요했다. 그 무렵 조선유민중에 일파인 [[수로왕]]의 세력이 구야국에 정주하자 구야국의 9간세력은 이들을 중심으로 재결집하기 시작했다. 수로왕을 중심으로 재결집된 구야국에 도전한 첫 세력은 [[탈해 이사금|탈해]]세력이었다. 탈해세력은 수로왕의 세력에 대패해 진한지역으로 도주했고 수로왕은 탈해세력을 200척의 대함대로 추격하기까지 했다.
조선 초기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의 인구는 속현인 [[웅천현|웅신현]](熊神縣)의 인구까지 포함해 7~8천명이었다. 3세기 경의 가락국의 인구는 김해도호부의 3배가 넘는 2만 5천명이었다. 이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인구규모로 본 삼한소국의 분류에 따르면 대국(大國)에 속했다. 이런 해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가락국을 변한제국내에서 맹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주었지만 한편으로 이에서 소외된 변한제국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했다. 3세기 초입에 가락국에 눌려 해상무역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던 변한 남해안의 7개국과 역시 가락국으로 인해 해상무역에서 힘을 못쓰고 있던 전남의 [[침미다례]]세력의 중심인 보라국(保羅國)<ref>나주</ref> 이 연합해 [[포상팔국]]을 형성했고 곧이어 그 포상팔국이 해상무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과 가야전체에 대항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209년]]에 포상팔국은 가락국과 가야의 두 번째 중심국이었던 [[안라국]]을 침공했고 중과부적으로 패했던 가락국은 당시에 유력한 적국(敵國)이었던 신라에 구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