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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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왕이부좌평 주색에[[임자 빠져(백제)|임자]]의 정사를이간으로 돌보지왕의 않자의심을 이를 간(諫)하다가 투옥되었다. [[656년]]([[의자왕]] [[16년]]) 옥중에서 임종을 당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려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육로는 [[탄현]](炭峴, 심현(沈峴))을 막고 [[수로]](水路)는 [[기벌포]](伎伐浦)를 방비하라 말하고 죽었다. [[의자왕]]은 그의 유언을 듣지듣고 실천하려했으나 임자의 이간으로 그만두었고 않다가그로인해 [[백제]]의 멸망을 가져왔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28|본기 권28 의자왕]] |인용문=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囚之獄中 由是無敢言者 成忠瘐死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瘐死]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時]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險隘]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ref>
 
그는 [[흥수]], [[계백]]과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