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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기 ===
경상북도 [[영천시|영천]] 출신으로 호는[[법명]]을 '''범산'''(梵山), 필명을[[필명]]을 철아'''김철아'''(鐵啞)로 썼다. 14세인 [[1914년]] [[은해사]]로 출가하고 이듬해 [[범어사]]의 명정학교 1년 과정을 마친 후 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서울의 [[휘문고등학교|휘문고보]]에 들어갔다가 [[1918년]]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 독립 운동 ===
[[1919년]] [[3·1 운동]]때 [[서울경성부]]에서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범어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리하여 [[3월 18일]] [[동래구|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만세운동 후 경찰의 경계망을 피하여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때 그는 불교학교인 [[불교중앙학림]] 내에 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白初月)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단본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하여 국외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