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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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은 [[대지법]](大地法)에 속한 [[마음작용]]인 [[혜 (마음작용)|혜]](慧: 판단), 즉 [[마음 (불교)|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과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10가지 [[마음작용]]들 중의 하나인 [[혜 (마음작용)|혜]](慧: 판단)의 그릇된 상태이다.{{sfn|권오민|2003|pp=192-197. 부정견(不正見)과 혜(慧)의 관계|ps="6수면설은 다시 그 중의 '견'을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계금취戒禁取·견취見取의 다섯 가지로 분별함으로써 10수면으로 발전한다. '견見(drsti)'이란 의식의 모든 순간에 나타나는 보편적 작용(즉 대지법) 중 '혜'로 분류되는 판단작용을 말하지만, 여기서의 '견'은 물론 그릇된 견해 즉 염오혜染汚慧를 말한다. 즉 그릇된 견해 역시 확인 판단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설일체유부]]의 [[대지법]]에 대한 교학에 따르면, [[대상불교 (불교)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을 [[인연]][緣]하여 [[마음 (불교)|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혜 (마음작용)|혜]](慧: 판단)의 [[마음작용]]이 그 [[마음 (불교)|마음]]과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면서 [[사 (불교)|사]](事: 구체적 사물)와 [[이 (불교)|이]](理: 진리성, 이치, 논리)를 판단하는데, [[마음 (불교)|마음]]이 [[번뇌]]로 덮혀 있는 경우 그 [[번뇌]]로 인해 [[혜 (마음작용)|혜]](慧: 판단)는 [[염오혜]](染汚慧) 즉 [[번뇌]]에 물든 [[혜 (마음작용)|혜]](慧: 판단)가 되고 [[염오혜]](染汚慧)는 [[마음 (불교)|마음]]으로 하여금 [[대상불교 (불교)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에 대해 그릇된 [[견 (불교)|견해]]를 가지게 한다.{{sfn|권오민|2003|pp=192-197. 부정견(不正見)과 혜(慧)의 관계}}
 
《[[구사론]]》에 따르면, [[정견]](正見)이건 악견(惡見)이건 모든 [[견 (불교)|견]](見)의 [[공능]](功能)은 [[심려]](審慮: 심사숙고)한 다음 [[결탁]](決度: 확인 판단)하는 것, 즉 숙고한 후 확인 판단하는 것인데, [[마음 (불교)|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을 이루는 [[6식]] 중에서 [[전5식]]과 함께 일어나는 [[혜 (마음작용)|혜]](慧: 판단)의 [[마음작용]]에는 [[견 (불교)|견]](見)의 [[공능]]이 없고 [[제6의식]]과 함께 일어나는 [[혜 (마음작용)|혜]](慧: 판단)의 [[마음작용]]에만 [[견 (불교)|견]](見)의 [[공능]]이 있다.{{sfn|세친 조, 현장 한역|T.1558|loc=제2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29n1558_p0010c16 T29n1558_p0010c16 - T29n1558_p0010c20]. 견(見)|ps=<br />"何故世間正見唯意識相應。以五識俱生慧不能決度故。審慮為先決度名見。五識俱慧無如是能。以無分別是故非見。准此所餘染無染慧及諸餘法非見應知。"}}{{sfn|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K.955, T.1558|loc=제2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214&startNum=86 86 / 1397]. 견(見)|ps=<br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정견]]은 오로지 [[의식 (불교)|의식]]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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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사론]]》에 따르면,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은 모두 오염된 [[견 (불교)|견]](見)을 [[본질 (불교)|본질]][性]로 하는 것, 즉 잘못된 [[심려]](審慮: 심사숙고)와 [[결탁]](決度: 확인 판단)을 [[공능]](功能)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 [[행상]](行相, 行)에 차이가 있어 [[유신견]](有身見, 薩迦耶見){{.cw}}[[변집견]](邊執見){{.cw}}[[사견]](邪見){{.cw}}[[견취]](見取){{.cw}}[[계금취]](戒禁取)의 [[5견]](五見)으로 나뉜다.{{sfn|세친 조, 현장 한역|T.1558|loc=제19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29n1558_p0099b02 T29n1558_p0099b02 - T29n1558_p0099b05]. 5견(五見)|ps=<br />"論曰。六隨眠中見行異為五。餘非見五積數總成十故於十中五是見性。一有身見。二邊執見。三邪見。四見取。五戒禁取。五非見性。一貪二瞋三慢四無明五疑。"}}{{sfn|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K.955, T.1558|loc=제19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214&startNum=861 861 / 1397]. 5견(五見)|ps=<br />"논하여 말하겠다. 6수면 가운데 '견(見)'은 그 행상(行相)이 달라 다섯 가지가 되고, 그 밖의 나머지는 '견' 아닌 다섯 가지(즉 탐·진·치·만·의)이니, 그 수를 합하면 모두 열 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열 가지 수면 중에서 다섯 가지는 바로 '견'의 성질로서,<sup style="color: blue">22)</sup> 첫 번째는 유신견(有身見)이며, 두 번째는 변집견(邊執見)이며, 세 번째는 사견(邪見)이며, 네 번째는 견취(見取)이며, 다섯 번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섯 가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니, 첫 번째는 탐(貪)이며, 두 번째는 진(瞋)이며, 세 번째는 만(慢)이며, 네 번째는 무명(無明)이며, 다섯 번째는 의(疑)이다.
<br /><sup style="color: blue">22)</sup> 여기서 '견(dṛiṣṭi)'이란 먼저 숙고[審慮]한 다음 확인 판단[決度]하는 것을 말한다.(審慮爲先 決度名見) 본론 권제2(p.86) 참조. 5견에 대해서는 본권 후술."}} 여기서 [[행상]](行相, 行)은, 인식에 있어서 객관우선주의의 입장을 가진 [[설일체유부]]의 견지에서는, 객관의 사물이 주관인 [[마음 (불교)|마음]](여기서는 6식 중 제6의식만을 말함, 즉 견(見)의 경우이므로 전5식은 제외됨)에 비친 모습, 즉 주관인 [[마음 (불교)|마음]]에 형성된 [[대상 (불교) 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의 모습을 말한다.{{sfn|운허|loc="[http://buddha.dongguk.edu/bs_detail.aspx?type=detail&from=&to=&srch=%E8%A1%8C%E7%9B%B8&rowno=4 行相(행상)]". 2012년 11월 2일에 확인. 행상(行相, 行)|ps=<br />"行相(행상):
[1] 소승에서는 주관의 인식 대상, 곧 객관의 사물이 주관인 마음 위에 비친 영상(影像)을 말함.
[2] 대승에서는 주관의 인지하는 작용을 말하니 곧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sfn|곽철환|2003|loc="[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5770&categoryId=2886 행상(行相)]". 2012년 11월 2일에 확인. 행상(行相, 行)|ps=<br />"행상(行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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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마음에 비친 객관의 모습을 인식하는 작용. 객관에 대한 주관의 인식 상태.
④ 관념.}}
따라서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의 [[행상]](行相, 行)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심사숙고하여 추론하고 판단하여 형성한 [[견 (불교)|견해]]들이 [[대상 (불교) 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의 실제 모습과는 어긋나는 것들 즉 잘못된 [[견 (불교)|견해]]들인 경우가 있는데, 그 종류를 5종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대상 (불교) 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이란 [[사 (불교)|사]](事: 구체적 사물), 즉 현재 마주하고 있는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육경|6경]](六境)뿐만 아니라 [[이 (불교)|이]](理: 진리성{{.cw}}이치{{.cw}}논리), 즉 현재 마주하고 있는 [[육경|6경]](六境)의 진리성, 논리 또는 이치도 포괄하는 말인데, [[견 (불교)|견]](見)은 후자의 [[이 (불교)|이]](理)에 대한 것이다.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은 [[마음 (불교)|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이 (불교)|이]](理: 진리성{{.cw}}이치{{.cw}}논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게 하는 [[마음작용]]인데, 이에 대해 [[마음 (불교)|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사 (불교)|사]](事: 구체적 사물), 즉 현재 마주하고 있는 구체적 대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게 하는 [[마음작용]]을 [[부정지]](不正知)라고 한다.{{sfn|무착 조, 현장 한역|T.1605|loc=제1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 ]. 부정지(不正知)|ps=<br />"何等不正知。謂諸煩惱相應慧為體由此慧故起不正知身語心行毀所依為業。"}}{{sfn|안혜 조, 현장 한역|T.1606|loc=제1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06_p0699b10 T31n1606_p0699b10 - T31n1606_p0699b14]. 부정지(不正知)|ps=<br />"不正知者。煩惱相應慧為體。由此慧故起不正知身語心行。毀犯所依為業。不正知身語心行者。謂於往來等事不正觀察。以不了知應作不應作故多所毀犯。"}}{{sfn|세친 조, 현장 한역|T.1612|loc=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12_p0849b24 T31n1612_p0849b24 - T31n1612_p0849b25]. 부정지(不正知)|ps=<br />"云何不正知。謂於身語意現前行中不正依住為性。"}}{{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loc=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4c14 T31n1585_p0034c14 - T31n1585_p0034c21]. 부정지(不正知)|ps=<br />"云何不正知。於所觀境謬解為性。能障正知毀犯為業。謂不正知者多所毀犯故。有義不正知慧一分攝。說是煩惱相應慧故。有義不正知癡一分攝。瑜伽說此是癡分故。令知不正名不正知。有義不正知俱一分攝。由前二文影略說故。論復說此遍染心故。"}}{{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loc=제6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338 338-339 / 583]. 부정지(不正知)|ps=<br />"무엇이 ‘부정지(不正知)심소’<sup style="color: blue">306)</sup>인가?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 그릇되게 이해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바르게 아는 것[正知]을 장애하여 계율 등을 훼범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훼범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sup style="color: blue">307)</sup> 부정지는 혜(慧)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이것이 번뇌와 상응하는 혜(慧)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sup style="color: blue">308)</sup> 부정지는 치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유가사지론』에서 이것은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바르지 않게 하는 것을 부정지(不正知)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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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유식론]]》에서는 위와 같이 [[본질적 성질]][性]과 [[본질적 작용]][業]을 밝힘으로써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을 정의한 후,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이 [[행상]](行相)의 차이로 인해 5가지의 염오견 즉, [[살가야견]](薩迦耶見, 有身見){{.cw}}[[변집견]](邊執見){{.cw}}[[사견]](邪見){{.cw}}[[견취]](見取){{.cw}}[[계금취]](戒禁取)의 [[5견]](五見)으로 분류된다고 말하고 있다.{{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loc=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1c11 T31n1585_p0031c11 - T31n1585_p0032a01]. 부정견(不正見)}}{{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loc=제6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308 308-310 / 583]. 부정견(不正見)}}{{sfn|황욱|1999|p=61. 부정견(不正見)}}
 
여기서 [[행상]](行相, 行)은, 인식에 있어서 주관우선주의의 입장을 가진 [[유식유가행파]]를 비롯한 [[대승불교]]의 견지에서는, 객관의 사물이 주관인 [[마음 (불교)|마음]](여기서는 8식 중 제6의식만을 말함, 즉 견(見)의 경우이므로 전5식은 제외됨)에 비친 모습, 즉 주관인 [[마음 (불교)|마음]]에 비추인 [[대상불교 (불교)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에 대해 주관인 [[마음 (불교)|마음]]이 그 [[대상불교 (불교)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sfn|운허|loc="[http://buddha.dongguk.edu/bs_detail.aspx?type=detail&from=&to=&srch=%E8%A1%8C%E7%9B%B8&rowno=4 行相(행상)]". 2012년 11월 2일에 확인. 행상(行相, 行)|ps=<br />"行相(행상):
[1] 소승에서는 주관의 인식 대상, 곧 객관의 사물이 주관인 마음 위에 비친 영상(影像)을 말함.
[2] 대승에서는 주관의 인지하는 작용을 말하니 곧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sfn|곽철환|2003|loc="[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5770&categoryId=2886 행상(行相)]". 2012년 11월 2일에 확인. 행상(行相, 行)|ps=<br />"행상(行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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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관념.}}
 
말하자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서는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의 [[행상]](行相, 行)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란 주관인 [[마음 (불교)|마음]]에 비추인 [[대상불교 (불교)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에 대해 주관인 [[마음 (불교)|마음]]이 그 [[대상불교 (불교)용어 목록/이#인식대상|대상]][境]을 인식하는 작용 그 자체가 '''이미 오염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인식 작용일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 즉 [[오염 (불교)|오염]]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바르게 심사숙고하고 추론하고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형성된 [[견 (불교)|견해]]는 [[오염 (불교)|오염]]된 [[견 (불교)|견해]]가 되며, 이들 [[오염 (불교)|오염]]된 [[견 (불교)|견해]]들을 5종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는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이란 [[마음 (불교)|마음]](여기서는 6식 중 제6의식만을 말함, 즉 견(見)의 경우이므로 전5식은 제외됨)에는 이미 대상의 실제 모습이 온전히 비추이는데 [[번뇌]]에 물들어 있는 상태의 [[마음 (불교)|마음]]이 그 비추인 대상에 대해 '''잘못''' 심사숙고하여 추론하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견해라고 보며, 따라서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의 [[행상]](行相, 行)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란 '마음이 행할 수 있는 잘못된 심사숙고와 추론과 판단'을 5종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