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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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sup style="color: blue">94)</sup> 무진(無瞋, adveṣa) 심소는 성내는 마음을 없애는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비 (마음작용)|비]](悲)는 [[불교 용어 목록/불#불해|불해]](不害)의 [[마음작용]]의 [[본질적 성질]]로서,{{sfn|세친 조, 현장 한역|T.1612|loc=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12_p0849a05 T31n1612_p0849a05]. 불해(不害)|ps=<br />"云何不害。謂害對治。以悲為性。"}}{{sfn|세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K.618, T.1612|loc=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1371&startNum=4 4 / 12]. 불해(不害)|ps=<br />"어떤 것이 불해(不害)인가. 이는 해(害)를 대치하는 것이니, 연민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다."}}{{sfn|안혜 조, 지바하라 한역|T.1613|loc=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13_p0852b22 T31n1613_p0852b22 - T31n1613_p0852b23]. 불해(不害)|ps=<br />"云何不害。謂害對治。以悲為性。謂由悲故。不害群生。是無瞋分。不損惱為業。"}}{{sfn|안혜 지음, 지바하라 한역, 조환기 번역|K.619, T.1613|loc=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1372&startNum=9 9 / 24]. 불해(不害)|ps=<br />"무엇을 해치지 않음[不害]이라고 하는가?
<br />해침을 다스리고, 중생을 슬퍼함[悲]을 성질로 한다. 중생을 슬퍼하기 때문에 여러 중생들을 해치지 않으니, 이것은 성내지 않음에 속하는 부분이다. 괴롭히지 않음을 업으로 삼는다."}}{{sfn|무착 조, 현장 한역|T.1602|loc=제1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02_p0481c24 T31n1602_p0481c24 - T31n1602_p0481c26]. 불해(不害)|ps=<br />"不害者。謂由不惱害諸有情故悲哀惻愴愍物為體。能斷害障為業。如前乃至增長不害為業。如經說由不害故知彼聰叡乃至廣說。"}}{{sfn|무착 지음, 현장 한역|K.571, T.1602|loc=제1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1361&startNum=19 19 / 293]. 불해(不害)|ps=<br />"불해(不害)<sup style="color: blue">102)</sup> 심소는 온갖 유정을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유정을 슬퍼하고 측은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해(害)의 장애를 끊음을 업으로 삼고, 앞에서와 같이 나아가서 불해를 증장함을 업으로 삼는다. 경전에서 “불해로 인하여 그 밝고 지혜로움을 알고..... (나아가 자세히 말함)”라고 말한 바와 같다.
<br /><sup style="color: blue">102)</sup> 불해(不害, ahiṁsā) 심소는 남에게 해(害)를 끼치지 않는 심리작용이다. 모든 유정에 대해서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무진(無瞋) 심소를 체성으로 삼고, 해롭게 함을 다스리고 연민히 여겨 고통을 없애주고자 함을 업으로 삼는다."}} 둘 다 [[자성선|본질적으로]] [[삼성 (불교)#선·불선·무기|선]](善)이다. 불교에서는 [[탐 (마음작용)|탐]](貪)으로서의 [[탐|애]](愛: 갈애, 애착, 집착)는 [[불교 (불교)용어 목록/정#증득|증]](憎: 증오, 미워함)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즉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탐|애]](愛: 갈애, 애착, 집착)가 [[불교 (불교)용어 목록/정#증득|증]](憎: 증오, 미워함)을 낳기도 하며 반대로 [[불교 (불교)용어 목록/정#증득|증]](憎: 증오, 미워함)이 [[탐|애]](愛: 갈애, 애착, 집착)를 낳기도 한다.{{sfn|星雲|loc="[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18622&DTITLE=%B7R 愛]". 2013년 3월 11일에 확인}} 그러나 [[자비]] 또는 [[사랑]]으로서의 [[탐|애]](愛)에는 이러한 면이 없다.
 
그리고 [[12연기설]]의 12지 가운데 제1지분인 [[십이연기설#(1) 무명(無明)|무명]](無明)과 제8지분인 [[십이연기설#(8) 애(愛)|애]](愛)와 제9지분인 [[취 (12연기)|취]](取)는 [[삼성 (불교)#선·불선·무기|선]]{{.cw}}[[삼성 (불교)#선·불선·무기|불선]]{{.cw}}[[삼성 (불교)#선·불선·무기|무기]]의 [[3성 (불교)|3성]]에 따라 살펴보면 그 성질이 본질적으로 [[삼성 (불교)#선·불선·무기|불선]] 또는 [[번뇌]]이다. 이에 비해 나머지 지분들은 그 성질이 [[삼성 (불교)#선·불선·무기|무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지분들은 [[삼성 (불교)#선·불선·무기|선]]이 될 수도 있고 [[삼성 (불교)#선·불선·무기|불선]]이 될 수도 있다. 즉 바른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그릇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즉 [[청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염오|오염]]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12연기]]의 [[유전연기]]는 이들 지분들이 [[그릇된]] 상태로 되는 것에 대해 특히 다루고 있는 것이며, 반면 [[12연기]]의 [[환멸연기]]는 이들 지분들이 바른 상태로 되는 것에 대해 특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십이연기설#(1) 무명(無明)|무명]](無明){{.cw}}[[십이연기설#(8) 애(愛)|애]](愛){{.cw}}[[취 (12연기)|취]](取)는 그 성질이 본질적으로 [[삼성 (불교)#선·불선·무기|불선]] 즉 [[악 (3성)|악]]이기 때문에 이들이 바른 상태로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다만 이들을 [[끊음]]으로써 더 이상 [[마음 (불교)|마음]]이 이들과 [[계합]]하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을 뿐이다.{{sfn|권오민|2003|pp=215-229|ps=<br />"[아비달마불교의 교학에 따르면] 모든 번뇌는 실유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소멸할 수는 없다. 물론 그것은 유위법이기 때문에 찰나찰나 생겨나는 순간 소멸하지만(이를 無常滅이라고 한다), 이것은 열반을 의미하는 번뇌의 단멸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멸하는 순간 동류의 또 다른 번뇌가 상속함으로써 우리들 경험상에 '번뇌'라고 하는 지속된 심리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