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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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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조선 선조|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에 모두 파괴되었다.
 
성곽과 성문이 다시 수축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 10년(1734년)이며 이때 남문을 명견루라 하였다. 그러나 명견루는 [[1767년]] ([[조선 영조|영조]] 43년) 큰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문루는 그 이듬해에 당시의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한 것으로 풍남문이란 이름도 이때 붙인 것이다. 풍남이란 풍패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는 전주를 풍패지향(沛之鄕)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풍패(沛)는 한나라 고조 [[전한 고제|유방]]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 곳에 비유한 것이다. 북문은 패북문이라 불리었다. [[대한제국 순종|순종]] 때인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년)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성곽과 성문은 모두 철거되고 이 풍남문만 남게 되었다.
 
풍남문은 그 후 [[종각]], [[포루]]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이 묻히는 등 그 옛모습이 크게 훼손 되었는데 지난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다시 원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