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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위생 홍보 활동과 고속 승진 =====
[[1906년]](광무 9년) 귀국한 뒤 [[일본]]의 후원으로 특별히 채용되어 관리가 되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의 후원으로 이례적으로 출세하였다.<ref name="riferencis258">송연옥, 〈대한제국기의 "기생단속령", "창기단속령"〉, 서울대학교사학회, 《한국사론 제40호》 (서울대 국사학과, 1998) 258페이지</ref> 그는 주소지를 한성부 남서(南署) 죽동(竹洞) 62통 12호 1반으로 주소지를 옮기고 탁지부에 신고하였다. 당시 그가 신고한 주소지는 [[대한제국 관원이력]]에 등재되었다. 이후 [[1907년]] 그는 한성부 서서(西署) 서소문내 내천동(內泉洞)으로 주소지를 옮겼다가 다시 [[1910년]] 경성 서부 황화방(皇華坊) 서소문내계(西小門內契) 정동(貞洞) 11의 1번지로 다시 주소지를 옮겼다. [[1906년]] [[6월]] 그는 한때 '협잡으로 인해 면관되어 일시 [[경무청]]에 체포되었다'고 한다.<ref name="disiros126">마츠다 도시히코, 《일제시기 참정권문제와 조선인》 (김인덕 옮김, 국학자료원, 2011) 126페이지</ref> 이때 선진위생정책에 해밝은 민원식을 눈여겨 본 내장원경 [[이명직 (문신)|이명직]] 대감의 발탁으로 [[1906년]](고종 9년) [[7월]] [[내부 (대한제국)|내부]] [[서기]](內部 書記)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달 27일 [[탁지부]] 서무과 [[주사]](度支部 庶務課 主事) [[판임관]]7급(判任官七級)으로 승진했다. [[8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견으로 [[내부 (대한제국)|내부]] 위생과장에 발탁되고 [[9월 30일]] [[군수]]로 전임된 [[이규삼]](李圭三)의 후임으로 [[내부 (대한제국)|내부]] [[참서관]] [[주임관]] 4등으로 내정되었다.
 
[[10월 1일]] 내부참서관에 임명되고 [[주임관]]4등(奏任官四等)에 서임되었다.<ref>"서임급사령", 황성신문 1906년 10월 05일자 01면</ref> 그 해 그는 [[엄준원]]의 딸이자 [[순헌황귀비|엄비]]의 조카인 [[엄채덕]](嚴彩德)과 결혼했다. 그는 [[조선]] 거리의 비위생적인 점을 문제점으로 제기, 방역과 소독 활동, 도로 포장 등의 활동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