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티 포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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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 투수진의 4선발로 시작해서 양키스의 No.1 투수가 된 포드는,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마운드에서의 침착함과 구위를 유지하는 능력으로 '회장님'(Chairman of the Board)이라고 불렸다. 또한 감독인 [[케이시 스텡걸]]이 포드랑 [[빌리 마틴]], [[미키 맨틀]]을 가리키면서 했던 말(Whiskey Slicks)에서 파생된 '뺀질이(Slick)'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포드는 타자를 압도하는 빠른 볼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투구에 속임수를 넣을 필요가 있었고 그럴 만한 다양한 구질과구종과 정밀한 제구력을 갖고 있었던 덕분에 뛰어난 투구가 가능했고, 좌완의 이점을 살려 주자들을 베이스에 묶어두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탈삼진 능력 또한 좋아서 1956년과 1958년에 아메리칸 리그 타이 기록인 6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을 두 번이나 세우기도 했다. 1955년에는 2경기 연속 1안타 경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만 노히트 경기를 한 적은 없다.)
 
그의 수상 경력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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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도 사이 영 상에 근접한 성적을 올렸으나 양 리그를 분리해서 주기 전이어서 [[내셔널 리그 (야구)|내셔널 리그]]인 [[LA 다저스]]의 [[샌디 쿠팩스]]에 밀려 놓쳤다. 사이 영 상이 1955년에도 있었다면 탈 만한 성적이었으나, 시상은 1년 뒤부터였다.
 
포드의 통산 기록을 보면 화려한 양키스 타선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산 236승이라 괜찮은 투수 정도이지 역사에 남을 전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활약하던 때 그를 둘러싼 외부 조건을 살펴보면 그의 능력에 대해 감안해야 할 부분이 나타난다. 먼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2년간 시즌을 보내지 못했던 점인데, 군 입대 전인 1950년에 90%의 승률, 그리고 복귀 후 첫 해에도 18승을 거둔 걸 생각해보면 지금의 통산 성적보다 더 많은 승수가 가능했을 거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점은 감독인 [[케이시 스텡걸]]이 그를 활용한 방식이다. 스텡걸은 포드를 선발 로테이션에 맞춰서 등판시키기보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타이거스]]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인디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화이트삭스]]와 같은 강팀들과 주로 맞붙였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보다 더 힘들게 투구해야 했고, 또한 등판 기회도 적었다.<ref>{{뉴스 인용| 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4&Total_ID=769811 | author= | work=중앙일보 | title=MLB 명예의 전당 (18) - 화이티 포드 | date=2002년 2월 25일}}</ref> 스텡걸이 물러난 후 감독이 된 [[랠프 후크]] 아래서 포드가 기록한 성적과 대비해보면 그러한 가정에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961년, 후크는 약속한대로 상대팀과 상관없이 규칙적으로 4일 로테이션을 돌려줬고, 덕분에 9년간9년 간 스텡걸 밑에서는 한 번도 30 등판 기록을 한 적 없던 그가 39번 등판을 해 25승 4패의 성적으로 [[사이 영 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선수 생활 중에서 가장 좋은 기록이었다. 다만 1961년 시즌은 [[로저 메리스]]와 [[미키 맨틀]]이 벌인 '[[베이브 루스]]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 경신' 경쟁이 가장 큰 화제였기 때문에 그의 성적은 대중의 주목을 덜 받은 면이 있다. 포드가 1961년에 세운 또 다른 기록으로 243이닝 연속으로 도루 허용이 없었다는 건데, 위에서 얘기한 주자 견제 능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1963년 5월, 완봉승을 거둔 후 포드는, 의사가 '담배를 피오는 건 버스가 출발할 때 나오는 매연을 얼굴에 그대로 끼얹는 것과 같은 거다'라고 한 충고를 받아들여 금연하겠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