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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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의 [[피론]]은 회의주의 "학파"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론은 인도로 여행하여 나체 수행자들과 공부하였다. 인도에서 피론은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감각은 쉽게 속으며, 이성은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욕망을 따른다.<ref>{{틀:웹 인용|last=Boeree|first=Dr. C. George|title=The Ancient Greeks, Part Three:|url=http://webspace.ship.edu/cgboer/latergreeks.html|publisher=Shippensburg University|accessdate=31 May 2013}}</ref> 피론주의는 기원전 1세기에 피론의 제자인 아이네시데모스가 설립하고, 2세기 후반이나 3세기 전반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기록한 학파이다. [[아카데미아|신아카데미아]]에서 알케시라오스와 [[카르네아데스]]는 완전한 진실과 거짓의 개념을 불확실한 것으로서 거부하는 더욱 이론적인 개념을 발달시켰다. 카르네아데스는 지식의 완전한 확실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독단론자들, 특히 [[스토아 학파|스토아 지지자들]]을 비판하였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경험론의 일면을 지식에 대한 주장을 위한 기반으로 포함시켜 회의주의 철학을 더 발전시켰다.<ref>{{틀:서적 인용|title=Greek Thought: A Guide to Classical Knowledge|url=https://books.google.com/books?id=kAFUjmNoQNEC|publisher=Harvard University Press|date=2000-01-01|isbn=9780674002616|language=en|first=Jacques|last=Brunschwig|first2=Pierre|last2=Pellegrin|page=937}}</ref> 
 
그리스 회의론자들은 [[스토아 학파|스토아주의자]]들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하였다. 회의론자에게 논증의 논리적 방식은 그 다음의 명제에 의지하지 않고는 참이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명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옹호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퇴 논증(regress argument)이었으며, 이것으로 모든 명제는 그 유효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명제에 의존하여야 한다. 회의주의자들은 두 명제는 순환 논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회의론자들에게 이러한 논리는 진리에 관해서는 불충분한 방법이며, 그것이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만큼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진리는 필연적으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생각이었다"생각"이었다. 회의주는 진리의 가능성을 부장하는 것으로 비판받았으나 사실은 논리론자들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비판적 학파로 보인다.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르네 데카르트]]는 그의 지식을 뒷받침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제1철학에 관한 성찰]]》을 시작하였다. 데카르트는 후에 이 진리를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인지하였으나 그가 이 진리를 찾기 전에 꿈과 악마로부터 유래한 회의적인 논증을 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