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 시키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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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시키부'''({{ja-y|和泉式部|いずみ しきぶ}}, [[덴엔]] 원년([[978년]]) ~ 사망 연대 불명)는 [[일본몰년 미상]])는 [[헤이안 시대중기]] 중기의 가인이다. [[에치젠 국|에치젠노카미]](越前守) 오에노 마사무네(大江雅致)의 딸로 태어났다. 중고(中古) 36가선(歌仙)이자 [[뇨보]](女房) 36가선의 한 사람이다.
 
== 경력 ==
에치젠노카미를[[에치젠 지낸국|에치젠]]노카미(越前守) [[오에노 마사무네와마사무네]](大江雅致)와 [[엣추 국|엣추노카미]](越中守) 다이라노 야스히라(平保衡)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오모토마루({{ja-y|御許丸|おもとまる}})라 불리며, 태황태후궁(太皇太后宮) 마사코 내친왕(昌子内親王)을 따르는 여동(女童)이 되었다(그녀의 어머니는 내친왕을 섬기는 뇨보였다) 하나, 이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설도 있다.
 
[[이즈미 국|이즈미노카미이즈미]]노카미(和泉守) [[다치바나노 미치사다]](橘道貞)의 아내가 되어 남편과 함께 이즈미 국으로 들어갔다. 뒤에 「이즈미 시키부」라는 뇨보의 이름도 이때 남편의 부임지와 남편의 관직명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 미치사다와는 훗날 헤어졌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고시키부노 나이시]](小式部内侍)는 어머니의 뒤를 잇는 노래 재능을 보였다. 교토로 돌아온 뒤에는 미치사다와 별거 상태에 있으면서 [[레이제이 천황]](冷泉天皇)의 제3황자 다메타카 친왕(爲尊親王)와의 열애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신분이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결국 그녀를 부모와 의절하게까지 했다.
 
친왕이 죽은 뒤에는 그 친동생 [[아쓰미치 친왕]](敦道親王)의 구애를 받았다. 친왕은 시키부를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정비(正妃)였던 후지와라노 나리토키(藤原濟時)의 딸이 가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쓰미치 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에이가쿠(永覺)를 얻었는데, 아쓰미치 친왕도 [[간코]](寛弘) 4년([[1007년]])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간코 말년([[1008년]] - [[1011년]]경)에는 [[이치조 천황]](一條天皇)의 중궁(中宮) ・ [[후지와라노 쇼시]](藤原彰子)의 뇨보로서 출사하였다. 죠와(長和) 2년([[1013년]])경에 쇼시의 아버지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게시(家司)로서 무용(武勇)으로 이름높던 후지와라노 야스아키(藤原保昌)와 재혼하여 그의 부임지인 [[단고 국|단고]](丹後)로 내려갔다. 만쥬(万寿) 2년([[1025년]])에 딸 고시키부노 나이시가 사망할 때까지도 살아있었던 것 같지만, 그녀의 만년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계명(戒名)은 '''성심원전혜법니(誠心院専意法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