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데 산마르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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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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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년, 에스파냐군에 입대하여 [[프랑스]]와 싸웠으며, [[바일렌 전투]]나 [[알부에라 전투]] 등에 참가하면서 산마르틴은 남아메리카 독립 지지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812년 그는 [[영국]]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남아메리카 합중국]](오늘날의 아르헨티나)에 투신했다. 1813년 산 로렌소 전투 이후 1814년 북부군을 지휘하기도 하면서 그는 [[리마]]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에는 [[쿠요]]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칠레를 해방시켜 바다로 리마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1817년 그는 [[멘도사]]에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갔다. 그리고 [[차카부코 전투]]와 [[마이푸 전투]](1818년)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치고 1819년 칠레의 독립과, 1820년 페루의 독립을 성공시켰다. 산마르틴은 1822년 7월 22일 이곳 [[부왕령]]의 수도를 부분적으로 장악했으며, ''페루의 보호자''가 된다. 페루의 독립 선언은 공식적으로 1821년 7월 28일에 이루어졌다. 1822년 7월 22일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동료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와 밀실에서 만난 뒤, 볼리바르는 페루를 완전 해방하는 과업을 맡는다. 산마르틴은 갑작스레 페루를 떠나 군대 지휘관직을 그만두고 정계와 군대에서 물러났다. 그는 1824년 프랑스로 갔다. 7월 22일 회담의 내막은 이후 역사가들의 논쟁거리가 된다. 또 한때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고국에서 중앙 집권론자의 비난을 받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가난한 생활을 하던 끝에 [[볼로뉴]]에서 사망하였다.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에스파냐로부터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그를 기린 [[해방자 산마르틴 장군 훈장]](''Orden del Libertador San Martín'')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