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196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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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서울특별시장 정무보좌역으로 일하였으며, [[2006년]] 이 대통령의 외곽캠프인 ‘[[안국포럼]]’을 꾸렸고 이후 전국을 돌며 ‘[[선진국민연대]]’를 이끌었다.<ref name=park>{{뉴스 인용|제목=박영준은 누구?로|url=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08/2008060800634.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우성 기자|쪽=|날짜=2008-6-8|확인일자=}}</ref>
 
이명박시장 재직시절인 2007년에 서울특별시 정무담당 국장이었으며, 제17대 대통령 당선자 비서실 총괄팀장을 맡았다. 이후 2008년에는 대통령실 기획조정비서관을 맡았으며, [[이명박]] 정권의 실세로 "왕차관"이라고 불리며불리었으나 국정파행 책임을 두고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공격을 받은지 이틀만인 9일 사퇴했고 6개월도 안 돼 [[2009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에 임명되었다.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에서 물러난 지 6개월도 안 돼 내각으로 복귀한 것은 해보기도 전에 ‘안 된다’ ‘불가능하다’하는 인재가 아닌 일을 스스로 찾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박 차장의 적극성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ref>{{뉴스 인용|제목=李대통령이 선호하는 인재 “이들을 보면 안다.|url=http://news.donga.com/3/all/20090619/8745946/1|출판사=동아닷컴|저자=박민혁 기자|쪽=|날짜=2009-06-19|확인일자=}}</ref>
 
2010년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임명되었다.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 대구광역시 중·남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최저 득표로 낙선했다.
 
[[2012년]] 5월부터 양재동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사건으로 재판, 그해 9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한달뒤 10월 17일에는 징역 2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출소 당일 한국수력원자력으로 또다시 구속 [[2014년]] [[2월 20일]]에는 5천만 원을 받은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으나, 2010년 10월~2011년 4월 김종신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으로부터 원전 정책수립에 한수원 입장을 고려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700만 원을 받은 혐의는 유죄로 판단, 징역 6월과 벌금 1천400만 원, 추징금 700만 원이 선고되었고<ref>{{뉴스 인용|제목='원전 비리' 박영준 전 차관 징역 6월 선고 뇌물수수 주요 혐의는 무죄|url=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0221000166|출판사=부산일보|저자=김백상 기자|쪽=|기사입력=2014-02-21 11:29:33|수정시간=2014-02-21 11:35:37}}</ref> 그 뒤 [[2014년]] [[11월 13일]], 만기출소했다.<ref>{{뉴스 인용|제목=박영준 2년6개월 만기출소|url=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414334&cloc=olink|article|default|출판사=중앙일보|저자=김정하 기자|쪽=|기사입력=2014-11-13 15:43|수정시간=2014-11-13 16:25}}</ref>
 
== 역대 선거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