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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권율은 원균을 다시 불러 곤장을 치고 다시 [[부산포]]로 나갈 것을 종용한다.
 
=== 패전과패전 전사그리고 죽음 ===
{{참고|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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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이 이끄는 병력 이외에 임치 첨사 홍견, 가리포 첨사 이응표, 해남 현감 류형, 녹도 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등 많은 장수들이 춘원포가 아닌 한산도로 퇴각하였다는 것과 한산도가 함락된 것이 칠천량 해전 이후 일주일이 넘은 후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에서<ref name="조선일일기"/> 견내량이 막히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런데도 통제사 원균은 춘원포에서 육지로 도망쳤고 수사 이억기와 최호는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봐서 원균은 지휘체계를 유지한 채로 춘원포로 후퇴했고, 지휘를 따르지 않은 배들은 한산도로 퇴각한 것을 알 수 있다. 군감들이 평가한 칠천량 해전의 전과는 시마즈 160척, 와키자카 야스하루 12척 등으로 200척을 넘지 않는데, 판옥선 이외에 조선 수군의 총 병력이 300척을 넘었다는 것과 전공이 보통 과장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 해전의 승리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ref>[[정한위략]]</ref>
또 칠천량 패전 이후 원균이 죽지 않았다는 목격담도 있다.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6일 을묘 5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 사망 직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