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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세종의 총애를 받은 집현전학사 [[윤회]]의 손자이며 [[신숙주]]의 처남이다.<ref name="성종9">《성종실록》 9년(1478) 5월 14일 5번째 기사</ref> [[1444년]](세종26)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1위로 급제해 집현전부수찬, 이조좌랑, 사간원좌헌납, 응교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 뒤 동부승지와 도승지를 거쳐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이어서 [[병조판서]]와 [[예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낸 뒤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 좌찬성 등을 두루 거쳐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으로 승진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윤자운(尹子雲)
취임일: 1470. 4. 6
퇴임일: 1471. 10. 20
재인기간: 1년 6개월 여
 
1416(태종 16)∼1478(성종 9). 63세.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시호는 문헌(文憲). 예의판서 소종(紹宗)의 증손이며, 집현전학사 회(淮)의 손자이고, 경연(景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백인(李伯仁) 의 딸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처남이다.
국조 방목의 기록에는 1415년 생으로, 자는 지망(之望)호는 낙한(樂閑)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분명 윤자운은 두 사람이다.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1444년에 식년문과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이조좌랑·사간원좌헌납, 응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부수찬으로 있을 때 수사관(修史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자 그의 요속(僚屬)으로 활약하였으며,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이 되어 대호군으로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겸하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가 1460년(세조 6)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때 세조가 여진족의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재(將材)를 구하게 되었는데 단연 그가 뽑혀 기복(起復)되어 이조참판이 되고 무송군(茂松君)에 봉하여져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원정에서 돌아와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는데 3년 상을 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그뒤 1462년에 병조판서, 1465년에 의정부우참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그의 매서(妹壻)였던 신숙주(申叔舟)가 영의정이었으므로 그를 의정부에 임명하는 것은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저촉된다 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세조는 의정부에는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임명할 수 없다 하여 1466년에 그를 의정부좌참찬으로 승진시키고, 이듬해에는 다시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마침 함경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그를 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使)에 임명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는데, 이시애가 이미 관찰사·절도사와 제진장(諸鎭將)을 죽이고, 또 그마저 죽이려고 칼을 빼들고 둘러싸 7일이나 지키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적(賊)이 정부를 속이는 위조문서에 서명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세조는 그를 위로하고 146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그 뒤 곧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좌리공신(佐理功臣) 등이 되어 무송부원군 겸 예조판서(茂松府院君兼禮曹判書)에 피봉(被封)되었다. 그리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476년(성종 7)에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사람됨이 단아(端雅)하고 상밀(詳密)하여 일생 동안 관부(官府)의 탄핵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 번 순찰사로 나아가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좌리공신으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구치관(具致寬) 등과 함께 예종이 승하한 뒤에는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사신(史臣)은 그를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정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으며 이시애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석으로 어머니가 사는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찾아보지 않는 일이 없어서 사람들이 이 노파는 자식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한다.
배위는 선산 김영륜(金永倫) 의 딸이다.
사우는 충남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 산 37-1에 있다. 보령시 향토유적 3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산27에 있다. 향토유적 제9호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李施愛(車文燮,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5).國朝人物考, 茂松 尹氏大同譜.
 
윤자운 역시 성주이씨와 무송윤씨가 있다, 왕씨인 신숙주와 처남은 무송윤씨이다. 무송윤씨는 혜령군 성주이씨의 장인의 가솔로 혜령군 성주이씨는 태종으로 불린 인물로 성비 원씨의 아들이다. 성비 원씨는 조영길 즉 서자 박침의 딸이다.
 
==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