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구치 겐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lexbot (토론 | 기여)
잔글 로봇이 바꿈: de:Mizoguchi Kenji
Wikier.bot (토론 | 기여)
잔글 봇이 동음이의 처리함: 양귀비 을 양귀비 (영화)로 연결
8번째 줄:
그의 중기에 겐지는 전근대와 근대의 전환기를 담는 사회파 영화인 '뉴 리얼리즘' 감독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문부성으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앞선 두 영화처럼 남성중심사회에 반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이 시기에 겐지는 그의 유명한 방법론인 '원신, 원샷' 원칙을 확립하였다. 그의 섬세하고 정통적인 세트 디자이너인 미즈타니 히로시는 겐지가 광각렌즈를 자주 이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쟁기간동안 겐지는 선전영화를 찍도록 군부로부터 강요받았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충신장 이야기를 담은 사무라이 시대극 [[원록충신장]](1941)이다. 이 시기에 겐지는 문제가 될만한 소재를 피해서 작품생활을 했다. 일본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던 무렵의 혁명적인 영화 [[여인의 승리]](1946)나 [[내 사랑은 불탔었지]](1949) 이후 겐지는 시대극으로 전환하여 전래되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주로 비극적 취향이 강했다. 이 때는 시나리오 작가인 [[요다 요시타카]]와 주로 함께했다. 이 때가 가장 인정받는 시기로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우게츠 이야기]](1953)을 비롯해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오하루의 일생]](1951)이 그러하다. [[산쇼 태부]](1954)는 봉건사대 일본의 유교적 도덕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편에 가까운 그의 영화 중에 칼라영화는 [[신페이가 이야기]](1955)와 [[양귀비 (영화)|양귀비]](1955) 뿐이다.
 
겐지는 교토에서 58세로 죽었는데 사인은 백혈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