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주자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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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ujiwara Seika.jpg|thumb|[[후지와라 세이카]]]]
일본 주자학의 역사는 400여 년이나 되었지만, 그 시기 동안 주자학은 줄곧 불교 [[선종]]의 예속 아래에 있었다. 주자학이 진정 학문으로 전개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였다. 이 시기의 대표 인물로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와 그이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1583-1657)이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래 승려였지만, 나중에 주자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가 이렇게 불교계를 떠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전리품으로 강탈한 한국의 유학 서적과 전쟁 포로 [[강항]](姜沆), 조선 사절단이었던 김성일(金成一), 허잠(許箴) 등과의 접촉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 아베 요시오(阿部吉雄)는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과 만나면서부터 그의 사상에 변화가 생겼으며, 이때 비로소 신유학에 대한 연구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고 하였다. 후지와라 세이카가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초청을 받았을 때, 그는 승려복 대신 유복(儒服)을 입고 도쿠가와를 만나 중국 역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석가]]는 이미 인종을 끊고, 의리를 소멸하였으므로 이단이라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도 취할 바는 있다고 인정하였다. 예를 들어 [[자비]]를 근본으로 생각하는 것은 훌륭하나, 승려들이 재물을 탐내는 것은 부처의 본의에 어긋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주장에 대해 "다 같이 [[요순]]을 존경하고 [[걸왕|걸]][[주왕|주]](桀紂)를 비난하며, 다같이 [[공자]]와 [[맹자]]를 존경하고 석가와 [[노자]]를 비난하며, 천리를 공으로 하고 사욕을 사심으로 한다" 고 평가하였다. 그는 또 신도(神道)와 유교의 조화를 주장해 "일본의 신도 역시 우리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만민을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은 깊고 신비한데, 이것을 중국에서는 유교라 하고 일본에서는 신도라 한다. 이름은 다르나 내용은 같다"고 말하였다.
후지와라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은 1604년에 후지와라 세이카를 스승으로 모시고 일생 동안 에도 막부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막부 체제 건립 시기에 문교 정책에 제정 등에 참여하여, 주자학이 에도 시대에 관학의 지위에 오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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