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학생 항일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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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간회는 이 광주학생 시위운동을 전국적 항일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0일 [[권동진]](3.1운동시 33인중 1인), [[허헌]], 동아일보사장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한용운]], [[주요한]] 등이 대책회의를 갖고, 12월 13일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를 갖고, 곧바로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 운동을 갖고, 지방지회에도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 체포와 투옥, 참기 인원 ===
이성현 멍청이
일본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12월 13일 아침 6시 신간회 주요간부 30여 명을 예비검속하여 서울의 진상발표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지방지회에 보내는 지시문은 이미 전달되어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1930년 3월초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시위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이 학생독립운동은 만주지역의 한인 거주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참가학교 총수에 대한 일제총독부의 기록은 처음에는 194개로 나타났으나 이후 참여학교에 대한 조사를 통해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는 2006년에 총 320개의 학교를 찾아내었으며, 이후 학생독립운동기초자료발굴팀등에 의해 350여개의 조선인관련 학교가 참여하였고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의 해외학교나 해외단체를 포함할 경우 참여규모에 대해서는 좀더 확대해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참여인원의 경우에도 학생이 주축이기는 하지만, 각종청년단체, 노동단체, 신간회, 해외 독립운동단체, 해외 피압박민족해방운동관련 옹호 지지운동단체, 반제동맹이나 중국공산당, 중국국민당의 각종 기관들, 해외조선인들이 만든 재만한족연합회와 같은 기성단체를 포함하면 규모나 역할, 국제적 성격은 1929년 세계정치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있다.
 
==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