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촉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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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양 장판전투 ===
[[201년]] 조운은 [[여남군|여남]]에서 패배한 유비를 따라 [[신야]](新野)로 가게 되었다. [[207년]] 형주에서는 [[유표 (후한)|유표]]가 죽어 후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그에 편승해 조조가 침공을 시작했다. 유비가 피난길에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할 때, 조운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유선 (공사)|유선]]과 미부인(糜婦人)을 조조의 대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아문장군(牙門将軍)으로 승진한다(장판 전투). 이 전투 중에 유비의 수하인 미방이 “조운이 아군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으나보고했으나 유비는 “조운은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운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라고 하는 자가 [[미방]]으로 나오며, 조운이 조조 휘하의 장수 [[하후은]]을 죽여 청강검(靑舡劍)을 손에 넣은 후 유선을 가슴에 품고 적군 한가운데에서 분전하였고, 그것을 본 조조가 조운에게 활을 쏘지말고 어떻게든 생포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용이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 삼국 정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