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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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Romanos et Eudoxie.JPG
|재위= [[1068년]] - [[1071년]]
|황후=<small>[[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small>
|이전 황제=[[콘스탄티누스 10세]]
|다음 황제=[[니케포루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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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즉위전에는 [[카파도키아]] 제국의 장군이었다. [[1067년]]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10세|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 사후, 어린 아들 [[미카일 7세|미카일]]을 대신하여 황후 [[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가 섭정이 되었으나, 국민이나 귀족층은 [[셀주크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한 강력한 군사정권의 수립을 원했다.
 
그 때문에 1068년 에우도키아는 로마누스와 결혼하여 그를 황제로 새로이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로마누스 4세였다. 즉위 후, 로마누스 4세는 북쪽에서 침략하던 [[페체네크족페체네그족]] 및 러시아인, [[노르만족]]과 화해하고 그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군사력을 강화해 셀주크 제국과 전투를 벌여 어느정도 전과를 올렸다.
 
[[1071년]] 로마누스 4세는 제국의 동쪽 국경지역인 아르메니아을[[아르메니아]]를 침략한 셀주크 제국군을 물리치기 위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친정하였다. 병력이 적었던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은 휴전을 바랬으나, 로마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만지케르트 전투|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비잔티움 제국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으나 용병에 의존했기에 훈련도 낮았고, 충성심도 없었다. 전투중 아군의 배신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군은 무너지고 로마누스 4세 또한 포로가 되었다. [[로마 황제 연대표|로마황제]]가 포로가 된것은 3세기 [[발레리아누스]] 이래 처음이었다. 이 패전으로 [[소아시아]]는 투르크인이 점령하게 되었고, 후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틴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편 아내 에우도키아는 남편이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된것을 알고, 남편을 폐위하고 [[콘스탄티누스 10세|전 남편]]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미카일 7세|미카일 7세 두카스]]을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해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석방된 로마누스 4세는 미카엘 7세의 황위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했으나, 사로잡혀 두눈이 멀게된뒤에멀게된 뒤에 추방되었다. 그는 1072년 실의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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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니케포루스 3세]] <br> (1078 - 1081)
|임기= [[1067년]] - [[1071년]]
|직책='''[[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두카스 왕조 (1059-1081)|비잔티움 제국의 황제]]'''<br> [[미카일 7세]]와 공동황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