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동음이의:한 |
편집 요약 없음 |
||
1번째 줄:
'''영가의 난'''(永嘉之
[[서진 혜제|혜제]](恵帝)의 치세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이후 고대부터 [중원](中原)이라 불리우던 화북(華北)지역은 혼란상태에 빠져 다수의 [유민](流氓)이라 불리는 피난민이 각지을 유랑하고 있었고, 예전 [[한나라]]시대 이후 중원에 침입하여 한민족과 함께 살고 있었던 새외민족도 활약의 기회을 엳보고 있었다.
[[산서성]]을 중심으로 이주했던 흉노의 족장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에 있었으나 [[304년]]
팔왕의 난 후, 진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는 상황에 있었기에 회제와의 관계에 잡음이 와 동해왕이 분사(憤死)하자 일거에 구심력을 잃어버렸다. [[311년]] 석륵군에 의해 진나라군이 대패하여 장병 10여만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낙양]]에 대군을 보내 함락시키고, 회제을 한나라의 수도 [[평양]](平陽;현재 산서성 임분현 山西省 臨汾
회제의 사후 [[장안]]에서 [[민제]]가 옹립되었으나 이미 실질적인 서진왕조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제도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얼마안가 살해되었다. 화북은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영가의 난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