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성: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Nkiodomeo (토론 | 기여)
Nkiodomeo (토론 | 기여)
89번째 줄:
[[1907년]](광무 10년) [[4월]] 기자릉(箕子陵)의 석물(石物)과 정자각(丁字閣)을 개수하는데 감독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6품에서 5품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 다시 정삼품 [[통정대부]]로 승자하였다. [[6월 8일]] 참모국 부국장 겸 제1과장직에서 면직되고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배종무관부 [[배종무관]](陪從武官府陪從武官)에 임명되었다. [[8월 24일]]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시종무관부 [[시종무관]](侍從武官部侍從武官)을 지냈고, 육군 [[기병]] 부장으로 승진했으며 뒤에 [[중장]]까지 승진했다. [[9월 9일]] 훈4등(勳四等)에 서임되고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1907년]] [[김좌진]]. [[노백린]]이 상경하자 이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또한 그는 황실에 숨겨져 있던 금괴 8상자를 빼돌려 대한협회의 군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이 알려지자 일본 [[한국통감부|통감부]]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그는 경무총장 겸 조선주둔 일본군 헌병사령관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本次郞)에 의해 3개월간 감금, 고문당했다. 통감부에 감금당한 그에게 아카시는 고종의 밀명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윤치성은 모른다로 일관하였다. [[8월 25일]] 군부 군무국(軍務局) 교육과장이 되었다가 [[10월]] 군부 군무국 예문과장(藝門課長)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 [[노백린]] 등과 함께 혁신피혁점(革新皮革店)을 개업하였다.<ref>동아일보 1926년 1월 24일자 2면, 사회면</ref> [[1909년]](융희 3년) [[6월 15일]] 육군 보병 부령으로 재직 중,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0월 28일]] 훈3등에 승서되고 팔괘장(八卦章)을 수여받은 뒤 다시 현역으로 소환되었고소환되고, [[1909년]] 기병 부장(騎兵副將)으로 승진되었다가 기병 중장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경성조선인 상업회의소 특별위원을 거쳐 [[경술국치]] 이후 군직에서 사퇴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